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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봄은 아름다웠다

by 블루밍드림

나는 봄이었다. 긴 겨울 내내 근심이 빛을 가려 바람이 시리더니, 내 가장자리로 바람이 불어 벚꽃 잎이 흩날렸다. 손을 뻗었다. 느린 꽃잎 하나 붙들기가 이토록 어려울까 싶었다. 퇴근길.. 나는 섰고 사람들은 스쳐 지났다.


긴 밤 지새운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주말 아침.. 도심 산길을 찾아들었다. 이팝나무 조팝나무 하얀 꽃이며 개나리 황매화 노란 꽃이 지줌지줌 흐드러져 피었다. 뚫어져라 바라본 것도 아닐 텐데, 속절없이 꽃빛에 젖어들었다. 겨우내 내 눈에 끼었던 서릿발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알록달록한 얼굴을 한 채 무심하게 선 내 곁을 스쳐 지났다.




봄날은 화려해도 나는 따분하였다. 홍제역으로 가 개미마을행 마을버스에 올랐다. 인왕산을 거저먹기로 오를 셈이었다. 비탈진 좁은 길을 재주 좋게 기어오른 버스가 산기슭에 멈추었다.


바람은 새소리를 실어 날랐다. 그 소리를 좇아 바위길을 올랐다. 어느 해인가 산불에 타버렸던 소나무가, 베어 지지 않았더니, 더러는 되살아나 잔솔가지를 키워냈다. 무작정 버텼더니, 상처가 깊을지언정, 초록 빛줄기 뻗어 나와 봄 허리를 감싸 안았다. 푸르름에 물들어, 내가 봄을, 봄이 나를.. 데면데면 스쳐 지났다.


가파르게 오른 길 끝 높은 데 올라서서 서울 도심을 내려다보았다. 아랫 세상 거칠게 없어 봄날이 외려 헛헛하였다.


가파른 길을 내려서니 누구는 또 그 길을 올랐다. 저마다 스칠 뿐 서로의 봄에 무관심하였다. 노곤해진 나의 봄은 산아래 수성동(水聲洞) 계곡에서 흐르기를 잠시 멈추었다.


수성동 계곡과 기린(麒麟) 돌다리


비 오는 날이면 수성동 계곡에 서 있으라 하였다. 세상 모든 소리를 잠재우는 소리를 들을 거라 하였다. 푸르름이 억수처럼 쏟아지던 날, '흐르는 물소리 예전엔 새 소릴러니' 귀 기울여 보았다.


겸재 정선(1676~1759) '장동팔경첩' 중 '수성동' @경향신문


물은 흘러야 맑다는데, 나는 여태껏 흘려보내는 연습이 부족했었나 보다. 옛사람 요즘 사람 맑은 물로 흐르던 곳에 서 있어도, 나는 그날이 오늘 같고 오늘이 그날만 같았다.


낙심한 채 서촌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나의 봄은 아직은 짙푸르고 알록달록 한 게, 그래도, 살 만하다 여겼다.



박노수미술관 뒤뜰


갈 길 서두르기를 또 멈추었다. 매국노의 옛집에 새날의 봄빛이 드리우니 제 멋대로 찬란하였다. 재주 좋은 화가가 옛집을 얻어 뒤뜰엔 자목련과 앵도나무가 유난히도 붉었다.


집 안으로 드니, 박노수미술관 그 속에서, 산은 노랬고 나무는 새파랬다.


박노수 '강' @네이트뉴스


한참을.. 뚫어져라 보고 있자니, 초록의 강기슭엔 덩그러니 나 홀로 섰다.


강물이 차올라 봄빛도 넘쳐흐를 터였다. 봄을 이고 지고 산 넘어왔어도 딱히 마음 쉴 곳 찾질 못하니, 굽이쳐 흐르는 강 위로 나를 떨구는 게 나으려나. 내가 강을, 강이 나를.. 서로가 언제 처음 보았는지 알 길이 없으니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나도 봄을 잘 그리는 화가이고 싶었다.


평범함에 감사할 줄 모르는 지독하게 미련했던 나의 세월 한 허리를 베어내어 작은 돛단배를 지어 강물 위에 띄우고 싶었다.




병든 것처럼 가슴 시렸던 지난겨울엔 아름다운 봄을 애타게 기다렸다. 마침내 봄이었지만, 그날이 오늘 같고 오늘이 그날 같기만 하였다. 그게 견디기 힘들었다.


내가 봄이란 걸 한동안 잊고 살았다. 나는 잊힌 봄이었다. 속절없는 나의 봄은 천리길 만리길을 굽이굽이 흘렀다. 목련꽃잎이 그새 늙어 툭하니 떨어졌다. 하나가 떨어지니 검버섯 오른 그다음 것도 떨어졌다. 붉게 빛나던 장미가 따가운 햇볕에 빠르게 말라갔다. 봄은 몹시도 빨리 저물었고, 어느새 무더운 날들이 찾아왔다.


새 계절이 내게 물었다, 너의 봄은 어땠냐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견딜 수 있을 만큼 산다’는 뜻이다.”...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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