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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석 궁전에 사는 꿈을 꾸었네

프랑스 고성(古城) 숙소 이야기

by 블루밍드림

오래된 성(城)에 찾아들었다


야간 대륙열차의 흑경 같은 차창에 기대어 리드미컬하게 덜컹거리는 밤의 심장소리에 잠 못 이루던 날이 있었다. 어떤 날은 컨템퍼러리 호텔의 넓은 창에 기대어 밤새 꺼질 줄 모르는 인공의 도시 빛이 뿜어내는 퇴폐적 영감에 취하는 날도 있었다. 여행이라는 지그소 퍼즐판을 앞에 두고 테두리부터 맞춰나갈까 아니면 독특한 모양과 색의 조각부터 찾아나갈까 고민하는 것만큼이나 '어디서 어떻게 한밤을 지날까'는 내겐 꽤나 중요한 선택이었다.


별 내리는 밤, 가까운 듯 먼 그리움, 흩어지는 생각들,.. 꿈을 꾸듯, 어쩌면 도피하듯, 그것들을 좇아서 깊은 땅 오래된 성에 찾아들 때가 있었다. 정원이 아름답냐고, 성은 마음에 드냐고, 성 안의 사람들은 자긍의 질문을 툭 던짐으로써 멀리 성 밖에서 찾아온 여행자들을 맞아들였다. 아주 멋지다고 화답하였다. 내 의견이 중요할 리는 없었다. 내가 본 성은 창연하였고, 그날밤 먼 그리움은 성 가까이 별빛으로 내릴 터였고,..


대리석 궁전에 사는 꿈을 꾸었다


성의 구석구석에 드리운 그림자는 잊힌 날을 살았던 옛 주인과 그 곁을 함께한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아주 화려하게 들려주었다. 귀하지 못한 아비는 이름난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한 불운한 아이들의 손을 이끌어 그림자를 따라 걸었다.


I dreamt that I dwelt in marble halls,

나는 대리석 궁전에 사는 꿈을 꾸었네.

With vassals and serfs at my side,

내 곁에는 신하와 시종들이 자리하였고,

And of all who assembled within those walls,

성 안에 모인 이들에게

That I was the hope and the pride.

나는 곧 희망이요 자랑이었죠.

... Michael W. Balfe(1808-1870)의 'The Bohemian Girl'(The Gipsy Girl's Dream) 중에서


그림자 위의 빛은 슈트케이스를 손수 끌며 회랑을 지나는 호기심 가득한 영혼들을 비추었고, 아비와 자식은 그 빛 아래 대리석 궁전에 사는 단꿈을 꾸었다.


Domaine de Vadancourt Chateau, "서부 전선 이상 없다"


프랑스 북부 오드프랑스(Hauts-de-France) 지방의 '솜(Somme)'이란 데파르트망(Département)까지 찾아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이곳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과 결전을 벌였다. 발광 성운 몇 개가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양 포탄의 섬광이 하늘을 날면 보병들은 철조망에 살이 뜯겨나가는 아픔을 돌 볼 틈도 없이 기관총을 난사하는 독일군의 참호를 향해 개미떼처럼 진군하였다. 백만 명이 넘는 양측 젊은이들이 솜 전투에서 피를 흘리고 산화(散花)하였다.


Le Domaine de Vadancourt Chateau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서부 전선 이상 없다)라던 독일군의 전황 보고처럼 지금은 명백한 무의미함의 상징이 되어버린 땅에도 때마침 4월이 찾아들어 들꽃들이 만발하였다. 사방으로 흩어진 가여운 영혼들의 증표인양 꽃들을 마주하니, 솜 언저리 메쎄미(Maissemy) 코뮌(Commune) 한적한 들판에서 '도멘 드 바당쿠르 샤또'(Le Domaine de Vadancourt Chateau)가 위용을 드러냈다.


이메일을 주고받았던 성의 안주인은 남편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 설명하며 정작 자신은 이따금씩 파리에 나가 놀 때가 좋다고 말을 이었다. 귀한 집안의 남편은 그곳에 뵈지 않고, 성의 기품에 가려진 안주인의 고달픔을 지레짐작으로 안쓰러워하였다.



비밀의 숲으로 모험을 떠나는 양 광활하게 펼쳐진 정원 산책길에 나섰다. 연못은 성의 그림자를 우아하게 품었다. 마차 바퀴 자국 길게 뻗은 키 큰 나무 사잇길로 한참을 걸었다. 아이비가 지천에 깔려 발걸음 옮길 때마다 즈려 밟혀 누웠다.



벽난로가 놓인 방에 들진 못했어도, 밤이 깊도록 조잘대던 아이들 소리가 잦아들자, 서로가 시종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은 네 식구의 아담한 방 창 밖으로 별빛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으스름한 새벽빛이 창을 통해 고색의 방 깊숙한 곳까지 비쳐 들었다. 알듯 모를 듯, 가까운 듯 또 먼 것 같은 어떤 그리움들이 그 빛을 타고 와 자꾸만 무거운 눈꺼풀 위로 내려앉았다.


세월이 흘러 더는 상흔이 뵈지 않아도 상처 입어 더 아름다운 꽃들은 해마다 피고 지기를 반복할 터였다. 이런저런 흩어지는 생각들이, 나 홀로 잠 못 드는 밤, 조금은 차가운 밤공기 사이를 낮게 비행하였다.


Chateau de Chissay, "불꽃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의 정원'이라 애정 섞어 부르는 루아르 계곡에서만 이틀을 보냈다. 샹보르 성, 블루아 성, 앙부아즈 성, 쉬농소 성,.. 왕가의 이름난 성들을 돌고 돌았다. 귀족들은 왕의 눈에 들어야 할터이니 그 가까이에 또 성을 지었다. 그렇게 남겨진 성이 그 땅에 삼백 개가 넘었다.


Chateau de Chissay

늦은 오후의 게으른 어스름이 거대한 '프랑스의 정원'에 길게 드러누울 때에야 쉬농소 성을 떠나 수 분만에 고성(古城) '샤또 드 시세'(Chateau de Chissay)에 당도하였다. 샤를 7세(1403~1461) 치하의 재무장관이 처음 이 성을 지은이였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프랑스에까지 쳐들어왔다. 프랑스 정부는 궤멸적 패배를 거듭하다 황급히 남쪽으로 피난하여 바로 이 성에서 국가 비상회의를 소집하였고, 6월 12일, 국방부 육군차관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이 이곳에 찾아들었다.


이틀 후인 6월 14일 파리가 함락되었다. 드골은 "전투에서 패했지만, 전쟁에서 진 것은 아니다."며 항전을 항변하였다. 하지만, 성 안엔 이미 혼란과 분열과 절망만이 가득하였다. 6월 17일, 런던으로 망명한 드골은 이튿날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프랑스 저항의 불꽃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며 레지스탕스를 호소하였다. 6월 25일, 프랑스는 끝내 항복하였다.


이탈리아 양식의 현관을 지나며, 굳은 표정을 한채 숨을 헐떡이며 성 안으로 뛰어드는 드골의 흔적을 애써 찾아 두리번거렸다. 기대 탓인지 욕심 탓인지 성 안뜰에 발을 내딛자마자 우리는 그만 오래된 그림자 덫에 걸려 시간의 진공 상태에 빠져들었다. 호텔 리셉션의 작은 벽난로엔 타닥타닥 들릴 듯 말듯한 소리와 함께 장작이 불타올랐다.



오백 년도 더 전에, 샤를 7세는 이 성에서 연회를 열었다. 분주하게 오가는 시종들의 실루엣이 성 안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를 간헐적으로 일렁이게 하였다.


루이 11세는 무엇이 그리 편했던지 맨발로 안뜰을 거닐곤 하였다. 같은 곳에 괜스레 우두커니 서있어 보았다.



국왕을 보필하는 신하들이 우리 방에 들었을까, 침략군을 겁내던 정부 각료들이 또 우리 방에서 긴 밤을 지새웠을까.. 방 안에는 삼백 년 전 가구가 아직도 살아서 그대로 놓여 있었고, 누구의 옷이 저 옷장에 걸렸을지, 이 팔걸이의자엔 누가 또 앉았을지.. 사소한 것들이 내내 궁금하였다.


밤이 되어 스스로 초대장을 쓰고 받아 연회에 참석하였다. 살롱(Salon)이었을 홀은 'La Table du Roy' 그러니까 '왕의 식탁'이라 이름 붙인 참으로 고풍스러운 레스토랑이 되었고, 호기롭게 그 안으로 들어섰다.


'사테를 곁들인 콩피 척 스테이크, 구운 플루마, 투르 리예트를 넣은 버섯과 컬리플라워 변형'. 난이도 최상급 제목의 메인 요리를 선택하고 나자 진짜 귀족이라도 된 양 우쭐해지니 그런 경박함이 따로 없었다. 흘낏 바라본 옆 테이블에선 구워진 비둘기가 식탁에 오르고 있었다.


그날밤, 꿈인 듯 현실인 듯 궁전에서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름난 집안에 태어나지 못한 불운한 아이들이 어떤 꿈을 꾸고 있을지 궁금하였다.


But I also dreamt which pleased me most,

나를 가장 기쁘게 한 꿈을 꾸었네.

That you lov'd me still the same.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여태 변치 않은 바로 그 꿈이었죠.


Chateau Saint-Just, "대리석 궁전이나 짚으로 만든 헛간이나"


Chateau Saint-Just

베르사유에 들렀다가 파리 북쪽 한 시간 거리의 생쥐스트 성(Chateau Saint Just)에 여장을 풀었다. 숙소는 별 볼 것 없지만, 절제된 듯 우아한 성의 생김새가 거부 못할 매력으로 나를 낚아챘었다. 13세기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무너졌고, 18세기인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으며, 정원은 프랑스 사적지가 되었다.



생쥐스트란 이름은 지명이겠거니 했지만, 머무는 내내 프랑스 대혁명의 '죽음의 대천사'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Louis Antoine de Saint-Just)의 망령이 곁에 머무는 듯하였다.



파리에서 성공하겠다며 집안의 돈 될만한 물건들을 훔쳐 가출했던 소년은 스물여섯에 프랑스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행복은 새로운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순결한 공화국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며 도덕적 인간과 사회를 창조할 혁명을 꿈꾸었지만, '독한 술에 혀가 마비되듯' 공포정치를 지겨워 한 옛 동지들의 배반으로 스물여덟을 넘기지 못하고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열여덟 생쥐스트는 오르강(Organt)이라는 장편 시를 지으며 다음 구절을 넣었다. "Sous le marbre et les chaumes, En ce moment, tous les hommes sont hommes."(대리석 지붕이든 짚으로 만든 지붕이든 모든 사람은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양치기가 대리석 궁전에 사는 왕 보다 더 행복하단 말이겠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성은 오랜만에 꿈과 현실의 조화된 아름다움을 깨닫게 하였다. 낮이 지나고 밤이 찾아들어도 그랬다. 그날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성 주위로 별빛이 내렸고, 가까운 날의 또 먼 날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그리워하였다. 이런저런 생각은 별빛을 타고 어둠 속으로 흩어졌고, 귀하지 않게 태어났던 나는 더는 대리석 궁전에 사는 꿈을 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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