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 여주
양평에서 하루를 묵었다. 특전사 아저씨가 알려 준 방법으로 물집을 해결하고 나니 발과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모텔에서 지친 육신을 깨끗하게 달래고 컵라면에 삼각 김밥으로 간단히 저녁을 때웠다. 아, 가난한 청춘의 모험이란. 개운하게 샤워를 하니 어느새 눈이 감겨온다. 잠이 언제 들었는지도 모른 채 아침이 밝아왔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한다. 여름에는 일찍 준비하지 않으면 더위에 지쳐 나가떨어지기 때문이다. 깨끗한 물로 세수를 하며 정신도 맑게 깨워본다. 보통 이 정도로 밖에 나가있다면 집이 그리울 만도 하건만, 혼자 덩그러니 있던 집이 생각나지 않는다. 어느새 난 길 위의 도보 여행가가 되었다.
짐이 잔뜩 들어있는 가방을 둘러메고 모텔을 나선다. 어깨가 벌써부터 고되다. '아, 가방을 한번 정리를 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찰나 배에서 들리는 반가운 소리. "꼬르륵" 아침을 먹어야겠다. 아침밥은 든든하게 먹어야 하루를 잘 버틸 수 있다는 생각에 항상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 했다. 마침 양평 장터가 근처라서 해장국을 먹기로 한다. 한참을 걷다가 노란색 간판의 양평 해장국 집을 찾았다. 글씨는 검은색으로 크게 쓰여있었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아주 좋았다. 가게에 들어서고 주문을 한다.
"양평 해장국 하나 주세요."
어서 밥을 달라고 보채는 장기에 시원한 물을 한 컵 들이켠다. 잠시 후, 고대하던 해장국이 나왔다. 부드럽게 부서지는 선지, 고소한 내장들이 한대 어우러지며 뻘건 국물에 우러난다.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한 입. "캬아" 저절로 아저씨가 된다. 이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은 해장국을 제대로 먹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해장국은 뭐니 뭐니 해도 시원한 소리를 내며 먹어주는 것이 정답이다. 허겁지겁 먹다 보니 어느새 한 그릇이 비워졌다. '나 몰래 누가 먹었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빠르게 없어졌다. 아쉽지만, 맛있는 첫 끼를 먹은 것에 감사하며 길을 나선다. 가게 문을 열고 나서자 뜨거운 여름바람이 맞이한다. 길 위에 섰다는 느낌이 몸 전체를 감싸고 여행가의 마음으로 다시 걷는다.
여름은 여름이다. 자전거 길 위엔 사람은커녕 흔한 자전거도 보이지 않는다. 가끔씩 마주치는 동네 주민들이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다. 오늘의 목적지는 여주. 양평에서 여주보까지는 약 28km 정도가 나온다. 그때는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GPS 장치가 따로 없었기에 네이버 지도에서 길을 인쇄한 뒤 형광펜으로 색을 칠해서 이동했다. "가보자!" 다짐을 하고 약간은 묵직한 다리를 교차로 굴린다. 닳아가는 신발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미친듯한 더위에 무아지경으로 길 위를 걷다가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준 보도블록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젊은이의 객기는 언제나 화를 불러온다. 하지만 그런다고 말을 들을 청년이 아니다. 젊은이들은 또 그래야 제맛이다.
어쨌든 한참을 앉아서 넋을 놓고 있었는데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어온다. "어디까지 가요?" 지친 몸은 뒤로 돌아볼 겨를도 없이 대답을 한다. "부산이요." 그러자 뒤에 있던 중후한 목소리가 점점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그리곤 옆 자리에 앉으며 팥 빙수 아이스크림을 건넨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면 이런 느낌이겠지. 분명 이런 느낌일 거야. 감사한 마음으로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며 할아버지를 본다. 건장한 할아버지는 매우 들뜬 표정으로 말한다. "아유, 정말 멋진 청년이네. 내가 아주 자랑스러워!" 할아버지 말씀에 가슴에서 무언가 불꽃이 튀겼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 이렇게 살려고 발버둥 쳐요. 제발 알아주세요.'라는 마음을 알아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날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통해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스크림을 신나게 빨고 씹으며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이어간다. 할아버지는 캠핑의 고수였는진 모르겠지만, 내 가방 상태를 보더니 서둘러서 물건을 다 꺼내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있는 그대로 느끼기로 한다. 할아버지는 무거운 물건을 아래로 보내고 등판에 가까이 붙여서 차곡차곡 짐을 다시 넣기 시작했다. 이때 새롭게 짐을 꾸리는 법을 몸에 익혔다. 길 위에서 배우는 모든 것은 소중하고 실전이라는 생각이 들어갈 때쯤 가방은 몰라보게 홀쭉해졌으며 위아래로 꽉 차게 정리가 잘 되었다. 어깨에 걸치니 무게감은 비슷했지만 확실히 메어질 때 느낌 자체가 달랐다. 무엇보다 편했다. 고수를 만나서 나의 모험은 다시 한번 용기를 얻었다. 그러자 나의 헌 운동화가 지르는 비명이 환호로 바뀌며 함께 호흡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