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렸던 이어폰과 쌍둥이 뱀

꿈과 현실, 그리고 고양이

by 하도

하나.


얼마 전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이어폰을 되찾았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서 오래된 낡은 재킷을 꺼내 입고 출근을 했는데, 그 호주머니 안에 들어 있었다. 문득 손아귀에 잡히는 것이 너무 많다고 느껴져 손을 호주머니에서 꺼냈을 때, 거기에는 똑같은 이어폰 두 개가 서로 꼬리를 무는 쌍둥이 뱀처럼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하나는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 이어폰이었고, 또 하나는 그 때문에 새로 산 똑같은 이어폰이었다. 내 손안에 든 그 이어폰 두 개를 한 동안 응시했다.


묘한 기분이 들어 조금 어지러움을 느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차원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이어폰을 되찾은 기쁨도 잠시, 늘 그렇듯, 이번에도 문제는 대체 어떻게 해서 그것이 그 호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는지 도무지 짐작을 못하겠다는 점이다. 일단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남았다. 그 이어폰은, 잃어버렸던 것이 아니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퇴근 후 샐러드로 저녁을 때우고, 이어폰으로 오디오북을 들으며 산책을 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에 돌아와 이어폰을 서랍장 위에 올려놓고 샤워를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어폰은 사라져 버렸다.


여기까지가 내 기억 속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기억은 이어폰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머릿속의 기억을 조금만 참조한 채 마치 탐정이라도 된 듯이 새로운 가설을 세워 본다.


아마 산책을 나갔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거울 앞에서 그 겨울 재킷을 꺼내 들고 한 번 입어봤을지도 모른다. '날씨가 춥네. 내일은 이걸 입고 출근할까?' 하고 생각해 봤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음, 아직은 좀 이를지도 몰라' 마음이 바뀌어 재킷을 원래 자리에 걸어놓고 잊어버린다.


말도 안 되는 가설이다. 이어폰을 갑자기 왜 호주머니에 넣었을까?


어쩌면 그날이 아니고 그다음 날 아침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젯밤 추웠던 날씨를 떠올리며 그 낡은 재킷을 꺼내 들어 입는다. 이어폰을 호주머니에 넣고 출근 준비를 마쳤을 때 갑자기 마음이 바뀐다. '음, 아직은 좀 이를지도 몰라' 마음이 바뀌어 재킷을 호주머니의 이어폰과 함께 원래 자리에 걸어놓고 잊어버린다. 그리고 이어폰이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그나마 말이 되는 것 같지만 역시 뭔가가 이상하다. 아무리 내가 건망증이 심하다지만 어떻게 방금 전에 이어폰을 호주머니에 챙겼던 것을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아마도 나는 앞뒤가 완전히 맞아떨어질 때까지 이 과정을 끝없이 반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완전한 설명을 찾게 되더라도 여전히 무엇인가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 순간의 기억은 이미 잃어버리고 없기 때문이다. 그 이어폰의 행적에 대한 진실이 무엇이건 그것은 90년 대 말에 유행했던 저 유명한 미드 문구처럼 ‘저 너머’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어폰을 잃어버린 것은 그날 하루만 일어났던 특수한 기억일 것이고, 산책 후 이어폰을 서랍장 위에 올려놓는 행위는 수백 번 반복된 일상의 기억일 것이다. 그래서 그 일상의 기억이 그날의 특수기억을 그저 덮어쓰기 해버렸나 보다. 마치 기억이 '이어폰은 그 자리에 놓여 있어야만 해'라고 내게 강제하듯이.


그런 식으로 기억 속의 빈 공간을 응시하며, 의미를 채워 넣으려 하면 할수록 상상과 기억이 뒤얽힌다.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제길, 또 그런다. 시작하지 말았어야만 했다. 그냥 '이어폰을 찾았구나', 한 번 기뻐하고 말았어야만 했다. 이제는 그 원래 버전의 기억마저도 무엇이었는지 혼란스럽다.


나는 이처럼 언제나 꿈과 현실 사이의 모호한 경계 위에서 살아왔던 것 같다. 어릴 때는 이런 경향이 더욱 심했다. 현실의 기억이 있어야 할 자리를 상상의 산물이 슬그머니 자리를 꿰차는 것이다. 그런 기질적 특성을 타고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때문에 일상적인 삶에 항상 서툴렀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도 늘 버거웠던 것 같다. 소통을 하려면 남들과 똑같은 것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대신 나는 꿈같이 모호한 어떤 이미지들에 늘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더 현실적이라고 해서 그들의 말이 항상 나보다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현실이 그들에게는 꿈이나 다름없듯이, 그들이 현실이라 주장하는 것들도 나에게는 그저 신기루 같은 것에 불과했으니까.




둘.


오래전에 있었던 자그마한 일화다. 그녀와 헤어진 지는 꽤 되었지만, 우리는 변함없이 종종 만나서 데이트를 즐기곤 했었다. 하루는 내가 진지한 어조로 미래 계획에 대해 다시 한번 떠들어 대자, 그녀는 그 계획의 비현실성이 너무하다 싶었는지 한마디 했다. "너는 너무 구름 위에서만 노는 것 같아. 늘 그랬지만."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었다. 예전에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꾸하곤 했었다.


"꿈이라는 것은 꼭 이루어져야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야."


하지만 우리가 헤어지고 난 다음인 그때는, 그 똑같은 말을 다시 하지는 못 하겠더라. 정말로 그런지, 나 스스로가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려던 말을 삼켜버렸다. 아마도 그게 우리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우리가 결혼을 했더라도 나는 결코 듬직하고 책임감 넘치는 그런 남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두 다리로 굳건하게 땅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것은 칭찬이다. 그리고 나처럼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꿈만 꾸는 사람들을 보면 불안감을 느낀다. 그것을 칭찬하는 법을 본 적이 없다. 스스로도 나 자신이 불안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세상을 가볍게 살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그 방식이 남들의 눈에는 공허하게 비추어졌나 보다. 왜 그래야 했는지 어릴 때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치를 부여하는 대상들이 남들의 눈에는 현실적인 무게가 결여되어 있었나 보다. 하지만 그 가치라는 것은 도대체 누가 결정하는 것인지. 어떤 사람들은 사회 보편의 가치를 손쉽게 내재화한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일에 서툴다. 다수는 언제나 소수를 제멋대로 재단한다. 나는 나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스스로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느낌을 오래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모든 슬픔과 우울은 현실 같고, 내가 나 다울 때만 느끼는 모든 기쁜 순간들은 마치 꿈만 같았다. 도대체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꿈 자체가 문제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문제일 뿐이다. 아마도 꿈과 현실이라는 고전적인 이분법이 문제일 것이다. 저 유명한 아르헨티나인 혁명가의 말이 생각난다.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그 말은 수없이 인용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몽상가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실행가능한 계획을 가지자'라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똑같은 말인가? 우리 문화권에서 꿈은 언제나 현실에서 파생되는 어떤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 물론 그러한 관념은 직관적이고 설득력 있다. 하지만 왜 그 반대방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드물까? 현실을 꿈의 부속물로 보는 철학적인 시각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시각을 현실적인 삶 속에서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까지 철학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그 한계는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나는 꿈과 현실 사이의 관계를 생각할 때면 늘 마그리트의 그림들이 떠오른다. 하나의 객체가 또 다른 객체로 뒤바뀌는 그런 것. 오브제와 배경이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는 그런 것. 꿈이 현실을 낳고, 현실이 꿈을 낳는 그런 것. 현실이란 그처럼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아직 마르기 전의 찰흙처럼 유동적인 어떤 것일 것이다. 우리의 관념이 그곳에 흘러들어 접촉하면, 도공의 손길처럼 그 모양새를 일부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그것을 가소성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현실이란 유리관 속에 놓고 감상만 하는 고려청자가 아니라, 늘 만지작거릴 수 있는 어떤 것일 것이다. 가끔은 그 손길이 너무나 은근해서 우리가 그 변화를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삶 속의 많은 것들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해서 차츰 현실화된다. 아주 느린 속도로 빙글빙글 돌면서 어떤 형체로 천천히 형성되어 나가다가,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뚝딱 현실 속에 그 모습이 복제된다. 삶의 기반인 물적 조건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삶의 물적 조건들은 우리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그 정신이 다시 투사되는 방식으로 현실 속에 다시 구현된다. 하지만 그 기반이 무엇이든 정신을 매개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는다. 정신은 창조하는 렌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아마도 유물론자의 그것에 더 가까울 것이고, 나는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몸에 복속되어, 우리 몸의 생명 유지를 위해 존재한다고 굳건히 믿는다. 하지만 정신의 신비로운 작용에 대해서는 늘 경탄하다. 정신의 힘과 자유를 믿고, 정신적인 것들이 세상을 바꾸는 힘을 믿는다. 그 흔해빠진 시크릿 유사과학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뇌를 주물럭대면 그 모양이 조금씩 바뀐다. 그리고 그 주물럭 거렸던 뇌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면, 이 세상도 조금 바뀌어 있을 것이다. 현실이 우리의 조건을 규정한다는 말은 백번 옳지만, 그 현실을 바꾸는 가능성은 여전히 정신적인 것에서 나올 것이다.


그렇게 주물럭 거려지고 재구성된 현실 위에 새로운 가능성을 피우는 것. 창조라는 것이 꼭 어려운 개념은 아닐 것이다. 현실의 조건들은 우리가 규정해 나갈 수 있다. 그 조건의 밑바닥에 놓인 물적 구조는 당장 바뀌지 않아도, 그 어떤 특정 조건에 특정 가치를 매기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정신적인 산물이다. 마치 하드웨어의 성격이 그것이 품은 소프트웨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과 같다. 똑같은 태블릿이 누군가에게는 게임기, 누군가에게는 글쓰는 타자기, 누군가에게는 그냥 텔레비전인 것처럼. 나는 이어폰을 두 가지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용도, 그리고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기 위한 용도. 단 하나의 오브제도 이처럼 정반대의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거기에 이율배반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적 조건의 쓰임새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니까.


그렇다면, 적극적인 꿈꾸기는 적극적으로 현실을 창조하는 행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꿈을 꾸다가 현실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세상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에는 위험이 따른다. 의미라는 것은 사회적 장면 속에서 타인의 동의를 구하기 마련이다. 타인의 동의를 얻기 전 의미는 언제든지 부서지기 쉬운 상태에 놓여있다. 그것은 파도에 끊임없이 부서지고, 끊임없이 다시 쌓아 올려야 하는 모래성 같은 것이다. 어떤 이들은 당장 성과가 없어도 그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시지프스가 그랬듯이. 그 무의미한 반복을 왜 계속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타인의 동의 없이 홀로 서는 방법이 있을까? 처음부터 타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혼자서 계속 꿈속에서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두고 자기기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끊임없이 모래성 쌓기를 시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안과 밖의 모든 방향에서 작게라도 합의를 보는 순간이 한 번쯤은 튀어나올 것이다. 현실 속에서 구현된 꿈이라는 것은 그렇게 안과 밖에서 합의를 보는 순간이다.


가소성이라는 특질을 지닌 우리의 뇌를 찰흙을 가지고 장난치듯이 마구 주물러 보자. 그러면서 가지고 있던 현실에 대한 믿음을 조금씩 깨 보자. 유약 바른 도자기를 다시 불속에 던져놓고 뜨거운 불로 다시 녹여보자. 새로운 시각이 열릴 것이다. 새로운 현실이 보일 것이다. 새로운 가능성이 보일 것이다. 그럼 누가 말랑말랑한 그것을 두고 이미 그것은 꿈이었다고 부르지 못할까? 그렇게 해서 우리는 알 수가 없게 된다. 꿈과 현실 무엇이 우선인지. 마그리트의 저 유명한 그림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복제해 낸다. 우리는 종종 그중 하나를 취하지만, 그것은 다른 하나의 뒤편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그 두 가지는 언제나 등을 서로 맞대고 서 있다. 그것들은 두 가지 꿈인 것이다. 그것들은 두 가지 현실인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마치 쌍둥이 뱀처럼 서로 뒤얽힌 두 개의 이어폰을 내 손 안에서 확인했을 때, 약간 어지러움을 느꼈던 것도 실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 새것이고, 어느 쪽이 낡은 이어폰인지 얼른 구분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을 도대체 어떻게 구분한단 말인가? 나는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 꿈과 현실. 그 둘은 그처럼 긴밀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왜 사람들은 항상 이 두 가지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려고만 들까?


나는 어릴 때부터 그 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셋.


꿈꾸는 행위는 우리 삶에서 물론 중요하지만, 세월이 조금 더 흐른 지금, 나도 현실감각이라는 것을 조금은 배웠다. 사람은 실패를 통해서 현실감각을 키워나간다.


어린 시절 꿈꾸던 꿈의 반의 반도 이루지 못한 나 자신을 거울 속에서 바라본다. 외모가 꽤 바뀌어있다.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진다. 나는 내 꿈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만들어 낼 대단한 재능이 없었다. 나는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어쩌면 내 노력의 초점은 항상 어딘가 어긋나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친구에게 전화기 너머로 넋두리를 한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내 꿈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몇 안 되는 친구들 중 하나였다. 그날도 내가 이루지 못한 꿈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꿈을 향해 좇을수록 그 꿈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해서 고백했다. 그 때문에 괴롭다고, 나 자신이 쓸모없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젊을 때 한 순간 품었던 꿈과, 현실의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일 거라고. 그건 그냥 한때 잠시 품었던 관념에 불과한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위로의 말을 자문자답하듯 말했다. 나의 현실을 스스로 자각하기 위한 그런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머리에서 나온 말일뿐이었고, 내 가슴은 여전히 이루지 못한 내 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것을 이루지 못한 자신과 비교하면서.


사람은 꿈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로 그런가? 현실이나 돈, 또는 성공을 먹고사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돈과 성공이 꿈의 목적인가? 물론 그 말의 의미는 안다. 현실은 늘 우리를 배반하기에, 그 현실을 견디도록 해주는 것은 꿈밖에 없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꿈이 없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살아가면서 해보고 싶은 일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꼭 거창하게 꿈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아도.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꿈은 있다. 문제는 꿈을 이루지 못하면 괴롭다는 것이다. 내가 그랬다. 한 때의 꿈을 가지고, 그 꿈과 자신을 동일시했던 만큼, 현재의 자신을 한없이 작게 느꼈다.


그 순간 내가 했던 그 말들이 그 친구의 두뇌 회로 어딘가에 남았던 모양이다. 몇 달 후 또 다른 전화통화. 마치 습관처럼 똑같은 넋두리. 이번에 그 말들을, 그가 나에게 되돌려 주었다.


"어릴 때 잠깐 품었던 관념을 평생 붙들고 갈 필요는 없는 거야."


그는 그렇게 나를 위로하면서, 그 말이 나한테서 처음 나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했다. 마치 그때 그 로벤 포드의 재즈곡처럼. 내 말의 음성 주파수가 그의 귀 속 달팽이관을 타고 들어가, 머릿속 시냅스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가, 똑같은 자극을 받자, 연상이 촉발되듯, 녹음기 스위치가 켜지듯, 다시 똑같이 흘러나왔다. 내가 스스로에게 되뇌던 똑같은 말을 가지고 타인에게서 조언과 위로를 받는 그 묘한 기분을 아는가? 내가 스스로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효과가 없던 그런 말이었다. 하지만 그 똑같은 말을 타인의 음성으로 다시 들었을 때, 그 효과는 강력했다.


그 후 나 자신을 내 꿈과 동일시하는 일을 그만둘 수 있었다.


어릴 적 꿈에서의 해방,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자유다. 그 후 이루지 못한 꿈을 붙들고 고민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꿈의 포기를 뜻하지는 않았다. 나는 꿈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대신 다른 꿈들을 대신 꾸기 시작했다. 보다 작고, 보다 더 현실에 가까운 꿈들. 그러고 보니 그 새로운 꿈들이 원래 가졌던 꿈에서 많이 다른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꿈은 재즈 선율처럼, 그렇게 자신을 끊임없이 변주하고 또 복제하는 것 같았다.


내가 어릴 때 가졌던 그 큰 꿈이 무엇이었는지를 여기서 구체적으로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창피하니까. 또 조금 추상적인 꿈이었다. 하지만 내가 얼추 가졌던 몇 가지 계획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로 나를 표현하는 시각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세상을 자유롭게 떠돌아다니고 싶었다. 첫번째는 포기했지만, 다른 하나는 비슷하게나마 이룬 것 같다. 다만 생각보다 너무 자주 떠돌아서 문제다.


가끔은 외롭다고 툴툴대다가도 가만히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홀로 있고 싶어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자유로운 영혼과 자기 세계를 가진 시각 예술가는 되지 못했지만, 상업예술의 언저리에서 그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다행히도 넥타이는 매지 않는다는 사실이 몇 안 되는 위안거리다. 자기를 표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렇게 틈틈이 혼자 읽을 글이라도 쓰며 작은 즐거움을 누릴 수는 있다. 삶은 종종 우리가 들인 인풋에 정직하게 반응한다. 물론 삶은 수학 함수가 아니라서 당신의 꿈이나 노력이 언제나 보답받지는 못할 것이다.


그 대신 삶은, 우리가 알아차리기 힘든 방식으로 우리가 꿈꾸고 추구해 왔던 것들을 정직하게 되돌려주는 것 같다. 그것이 우리가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 대신 그것은, 어느새 슬그머니 다가와 곁에 기대는 고양이다. 냐아옹.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이란 그 작고 변형된 것들을 알아보는 안목이나 기술을 기르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삶의 스킬 없이는 당신은 삶에서 언제나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일상에 지치고, 불확실한 미래에 지쳤다. 그래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만 너무 집착하지만 말자. 너무 피곤하고 나이가 들어서 새로운 꿈을 꿀 힘이 남아있지 않다면, 어릴 적 꿈이라도 조금 되새겨보자. 이루지 못한 꿈이라도 좋다. 아무리 현실감각이 중요하다지만, 어떤 쓸데없는 상상도 다시 한번 해보자. 가령, 혹시 내 꿈도 그 이어폰처럼 잃어버렸던 것이 아니었다면 어떨까? 지금 저기 어딘가, 저 벽장 안 어느 낡은 재킷 주머니 안쪽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뒹굴고 있다면 어떨까? 그러다 어느 추운 겨울날, 오들오들 떨다가 재킷 안쪽에 손을 찔러 넣었다가 뺐는데, 그 잃어버렸던 꿈들이 손아귀에 한꺼번에 딸려 나온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기분은 어떨까?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기분이 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이미 안다. 쌍둥이 뱀.


나는 이어폰을 잃어버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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