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가 나와, 섹스가! (1)

다시 피지 않는 꽃

by 하도

하나.


이것은 섹스에 관한 글이 아니다. 그리고 리디아는 그녀의 본명이 아니다.


나는 항상 느렸다. 꼭 연애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말들이 안에서 모양새를 갖추어 나올 준비가 되기까지 늘 시간이 한참 걸렸다. 마치 외출 준비를 하는 여자들이 늘 그러듯이. 성장기를 거쳐 오면서 내가 익힌 사회적 기술 중 하나는 말이 형성되기를 기다리기 전에 재빨리 머리를 굴려 다른 어떤 말을 찾아 대신 내뱉는 것이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항상 뒷자리 구석 어딘가에 남는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분명히 효과가 있지만, 문제는, 그런 식으로 나 자신을 늘 소외시킨다는 것이다. 간혹 내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게 남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말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시킨다.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소통은 원래가 늘 실패하게끔 되어있는 것 같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소통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일찌감치 마음을 닫고 그냥 체념해 버린다. 나는 어느 쪽일까. 때로는 말도 침묵도, 소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말은 항상 너무 많거나, 너무 없거나, 또는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거나 한다. 나는 적절한 순간을 포착하는 일에 항상 서툴렀고, 언제,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말할지, 그것은 항상 숙제 같은 일이었다.


그것을 폴라로이드로 찍은 듯한, 작고 우스운 일화가 하나 기억난다. 그 스냅사진 몇 장을 여기서 꺼내본다. 지금도 여전히 서툴지만, 나이가 어렸을 때는 아주 심하게 서툴렀다. 극장 옆 아파트에 세 들어 살 무렵, 리디아와의 관계도 그런 식의 숙제처럼 느껴졌었다.


그녀는 도미니칸이었지만, 백인이었다.


“사람들이 내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볼 때마다 내가 도미니카에서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항상 그래. ‘근데 넌 백인이잖아?’”


그 농담은 리디아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그 농담의 마지막 부분을 말할 때마다 리디아는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를 낮게 깔며 강조하곤 했다. 그 짧은 연기가 끝나면, 자기 혼자 배꼽이 빠져라 깔깔거리곤 했다.


나는 그 농담을 적어도 세 번은 들었다. 한 번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또 한 번은 어떤 파티에서 그녀가 어떤 남자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마지막은 또 다른 어떤 파티에 갔을 때, 그 집 테라스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면서. 그때 리디아는 술에 적당히 취해 있었고, 그 농담을 이미 나에게 한 번 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 다시 한번 크게 깔깔거렸다. 그녀의 유쾌한 깔깔거림은 나를 항상 즐겁게 했다.


하지만 그 웃음의 포인트가 어디인지는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 눈에 비친 리디아의 외모는 그냥 전형적인 유럽 백인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섬나라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무엇인지 모를 은근한 열등감이라도 있었던 것 같았다. 그때도 지금도, 나에게는 그녀가 나고 자란 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곳은 내겐 그냥 미지의 영역이었다. 몇 번인가 인터넷을 통해 도미니카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시도했었다. 하지만 자료도 많지 않았고,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대상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리디아가 도미니칸인 백인이었는지, 백인인 도미니칸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마드리드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도시 북쪽에 있는 어떤 콜롬비아인 가족이 사는 집에 방을 하나 구했다. 주인아주머니는 그 근처 공립 병원 간호사로 일하던 뚱뚱하고 신경질적인 여자였는데, 잔소리가 너무 심했다. 이사를 또다시 가는 것은 귀찮은 일이라 나는 그곳에 어떻게든 적응해 보려고 애썼다. 그런데 하루는, 밤중에 내가 담배를 피우러 밖에 나간 사이, 그 주인아주머니가 현관문 걸쇠를 걸어버렸다. 비록 고의는 아니었지만, 나는 추운 바깥에서 외투도 없이 덜덜 떨면서 아침해가 뜰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때 내가 가진 담배는 금세 바닥났다. 그날 이후, 그 집주인에 대한 인내심도 바닥나 버렸고, 이사를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다른 장소들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리디아를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마드리드 도심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라띠나라고 불리는 구시가지 지역이 있다. 오래된 건물들과 시장과 바와 레스토랑 그리고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적어도 백 년은 되어 보이는 그 아파트 건물에 처음 도착했을 때, 금발의 그녀가 아래층으로 나를 마중 나왔다. 그리고 이층에 있던 자기 아파트로 나를 안내했다. 렌트 광고를 보고 메시지를 보냈을 때만 해도, 집주인이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곳은 보통 ‘여자들만’이라는 문구를 광고에 집어넣곤 하는데, 그런 글귀를 어디서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실수로 빠트렸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를 맞이할 때 그녀의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빨간 페인트를 칠한 거친 질감의 벽. 그 벽면에 걸린 선반을 가득 채운 디자인과 여행 서적들. 작은 방 두 개, 작은 부엌 하나, 그리고 그보다 작은 코딱지만 한 발코니. 노란색 소파 맞은편 벽에는 사용하지 않는 벽난로가 있었고, 그 위 선반에는 각종 술병들, 향초, 꽃, 그리고 영화 DVD들이 조금 어수선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검은 고양이 두 마리가 좁은 바닥에서 서로 장난치며 뛰어놀고 있었다. 그 장소는 내게 마치 스페인을 작게 함축시켜 놓은 곳처럼 느껴졌다. 리디아는 한 여행사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리디아가 그 아파트의 소유주는 아니었고 자신도 렌트 중이었는데, 월세 감당이 힘들어서 룸메이트를 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면접을 위해 소파에 마주 앉았고, 나는 여러 가지 기본적인 질문들을 받았다. 리디아는 말이 빠른 여자였다. 그녀가 내 직업을 물었다.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했다. 나이를 물었다. 내가 그녀보다 두 살 많았다. 우리가 비슷한 나이대라는 사실을 그녀는 마음에 들어 했다. 내 경제력에 대해 물었다. 나는 사업하는 사촌이 하나 있는데, 내 유학자금을 지원해주고 있다고 둘러대었다. 그 편이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어 간단했다. 그렇게 룸메이트 면접을 마쳤으니 이제 남은 일은, 그럼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고 작별 인사를 한다음 그 집을 떠나면 된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벽난로 위에 놓여있던 럼 한 병을 가리켰다. 그리고 물었다. 저거 럼이냐고. 나는 그게 럼인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냥 물어봤다. 그저 대화를 좀 더 이어 나가기 위해서.


“조금 마셔볼래?” 그녀가 부엌으로 사라지더니 잔 두 개를 내왔다. 우리는 친구처럼 마주 앉은 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무슨 대화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사를 기억하는 내 능력은 언제나 형편없다. 하지만 우리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술잔은 계속 비워졌고, 그 조그만 발코니에 서서 담배를 함께 피웠다. 그리고 다시 마셨다. 해가 지고 어둑해졌다. 서로의 불행했던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녀가 울기 시작했다. 서로 부모에게 상처받았던 이야기가 나왔다. 첫 만남에서는 너무나 무거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술이 들어갔을 때, 리디아는 말이 지독하게 빨랐다. 나도 꽤 빨라졌을 것이다. 아마 우리 둘 다 살아오면서 쌓인 말들이 많았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내 어설픈 스페인어 사이사이의 공백을 헤집고,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전부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단어를 많이 쏟아내다 보면, 상대방이 알아서 내 말의 의미를 주워섬기는 순간들이 있다. 그때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대충 말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진지했고, 그녀는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꺼내도록 도와주었다. 거의 목부근까지 가득 차 있었던 럼 한 병이 어느새 바닥났고, 우리는 그 옆에 있던 코냑을 열었다.


그러고 나서 잠시 내 기억 속에서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사라진 순간이 있다. 아마도 술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른하고 머리가 아팠던 것 같다. 담배 때문에 목도 아팠던 것 같다. 그리고 기억나는 그다음 장면. 리디아는 카펫 깔린 바닥 위에서 발버둥 치며 뒹굴고 있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던 스커트가 말려 올라가며 두 다리가 드러났다. 검은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몇 군데 찢어진 구멍들이 보였고, 그 사이로 하얀 허벅지 맨살이 드러나 보였다. 여기서 분명히 말해 둘 것은, 그것은 절대로 성적으로 유혹적인 장면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바닥에 뒹구는 어린애처럼, 터져 나오는 감정을 쏟아내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봤다. 그녀가 내뱉는 스페인어 단어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 단어들이라기보다는 감정들이었을 것이다. 잠시 후 조금 진정이 되면서 정신이 돌아왔는지, 리디아는 눈물을 닦으며 일어나 옷매무새를 주섬주섬 챙겼다.


조금 지친 나는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며 일어섰다. 현관문 앞에서 작별인사를 할 때, 리디아가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고 소리쳤다.


“우리 친구 맞지? 우리 친구인거지?”


나는 또 다른 격한 감정에 잠시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친구가 맞다고 차분하게 대답했고, 렌트를 할지 말지 결정이 되면 다시 연락 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나는 그때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또 리디아가 울면서 무슨 말을 하고 있었던 건지, 아직도 모른다. 언제나 그렇듯이 내 기억 속에는 구멍 난 곳들이 너무나 많다. 마치 그 찢어진 검은 스타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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