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가 나와, 섹스가! (2)

다시 피지 않는 꽃

by 하도

둘.


우중충한 내 방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콜롬비아인 가족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웠지만, 숙취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고 잠이 오질 않았다. 그날 일에 대해 한참 생각했다. 그곳에 렌트를 들어갈지 말지를 결정 내려야만 했다. 리디아의 빨간 벽 아파트는 분명히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망설여졌다. 첫 번째 문제는 가격이었다. 지금 내고 있던 렌트비의 거의 배를 내야만 했다. 만일 그곳을 렌트하면 매달 생활비가 빠듯해질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장차 내 룸메이트가 될 리디아의 성격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에게는 분명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감정조절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어설픈 심리학 지식으로 그녀가 조증일 거라고 판단 내렸다.


결심을 내리는 데는 여러 날이 걸렸다. 결국 강렬한 이미지들이 주는 유혹에 굴복했던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나이였다. 리디아에게 네 집에 세 들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고, 그 오지 않는 답장은 나를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 마침내 리디아에게 답장이 왔을 때, 그녀는 문자 대신 통화를 하고 싶어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날 밤과는 다르게 차분하고 낮았다. 하지만 말은 여전히 빨랐고, 차갑고 논리적인 말투로 왜 나에게 렌트를 해 줄 수 없는지를 하나하나 설명해 나갔다. 그 내용을 다 따라잡지는 못했지만, 마지막 요점만큼은 분명했다. 비슷한 직종에 일하는 다른 여자한테 그 방이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그 작은 아파트에 젊은 남녀 둘이 룸메이트로 지낸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알았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 작은 스페인은 그렇게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같은 라띠나 지역의 오래된 극장 옆 어느 아파트에 방을 하나 구할 수 있었다. 집주인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무명 배우였고, 밤에는 근처에 있던 '카페 갈도’라는 어느 바에서 관리일을 맡고 있었다. 우리는 집주인과 세입자로서 서로를 첫눈에 마음에 들어 했다. 나는 잘생기고 인상 좋은 그가 좋았고, 그도 내가 세입자 후보 첫 순위이니 꼭 연락을 다시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집에서 지내려면 어떤 규칙들이 있냐고 내가 먼저 나서 물어보았던 점이 호감을 샀던 것 같다. 가격도 적당했다. 그리고 그곳은 리디아의 빨간 벽 아파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얼마 후 나는 리디아에게 한심한 문자메시지를 한 통 보냈다. ‘너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방을 구했다. 네 고양이들을 보고 싶다. 너의 고양이들이 춤추는 모습이 벌써 보이는 것 같다.’ 그 문자를 보내면서 내가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답장은 오지 않았고,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문자는 바보짓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이사를 하느라, 학교 수업을 듣느라, 정신없이 지내던 어느 날, 리디아가 문자를 한 통 보내왔다. 그다음 주말에 근처에서 노천시장이 열리는데, 자기 친구랑 놀러 갈 거란다. 나도 오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물론이지. 나는 즉시 답장을 보냈다. 주말이 오자 약속 장소에 나가 그녀와 그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갖가지 물건들을 구경하며 재밌게 시간을 보냈다. 그날 오후는 한순간처럼 지나갔다.


그 후로 리디아는 틈만 나면 나를 불러내기 시작했다. 더 많은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고, 함께 시장을 돌아다녔고, 파티에 초대받으면 나를 데리고 갔다. 하루는 그녀의 단골 바에 한 잔 하러 들렀다. 친분이 있던 바텐더에게 날 소개한다. “한국인이에요 한국인. 여기 공부하러 왔어요.” 그리고 혼자 키득키득 거린다. 그게 뭐 어쨌다고. 하지만 리디아의 키득거림에는 어떤 전염성이 있었다. 나도 키득거림을 멈출 수가 없었고, 바텐더도 키득거렸다. 우리는 그렇게 친해졌다. 어쩌면 리디아는 내 바보 같은 문자를 보고 혼자 키득거렸는지도 모른다. 비록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녀는 그런 성격이었다.


아마도 작은 섬나라에서 왔기 때문인지, 리디아에게는 아시아인들에 대한 어떤 차별적인 편견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아주 소탈했다. 나중에 시간이 좀 더 지나면서 깨닫게 된 점이지만, 우리 문화권에서는 말이 너무 복잡하다. 항상 복잡한 관념을 언어의 밑바닥에 깔고, 그걸로 자신을 표현하고 또 장식하기를 좋아한다. 농담도 수준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리디아에게는 그런 점들이 전혀 없었다. 비록 감정기복은 심했지만, 그 구조는 단순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웃기면 웃긴 그런 것이었다. 그런 단순 솔직함은 중독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머리가 나쁜 여자는 아니었다. 언젠가 자기는 아시아인과 데이트해보고 싶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졌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썼던 또 다른 에세이 ‘마드리드, 카페 갈도에서’는, 아마도 내가 리디아에게 들려주었던 경험담이 그 글의 원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프랑스인 친구가 가리켜서 쳐다봤지. 저 쪽에 그 미녀가 있다구. 그런데 너무 멀어서 잘 안보이더라구. 그냥, 두 눈만, 개구리처럼 이따 만 했던 게 기억나.”


내가 개구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자, 리디아가 배꼽을 잡고 쓰러진다. “개구리라니, 개구리래! 깔깔깔” 나는 그녀의 그런 단순하고 과장된 리액션이 좋았다. 비록 나중에 그 이야기를 에세이로 다시 쓸 때 ‘개구리’ 대신 ‘아만다 사이프리드처럼 큰 눈’이라고 좀 더 점잖은 표현으로 바꾸지만, 나는 그 문장을 다시 읽을 때마다 눈 큰 개구리 이미지와 함께 리디아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뒤섞여 떠오르곤 했다.


하루는 자기가 출장 가 있는 동안 고양이들을 좀 봐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물론 봐줘야지. 리디아가 키우던 그 작고 검은 친구들과 놀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 빨간 벽 아파트 카펫 바닥 위에서 고양이들과 장난치고 있자니 문자가 한 통 날아온다. 집을 나서기 전에 잊어버렸는데, 부엌에 있던 쓰레기 좀 비워달라고. 물론이지. 그렇게 답장을 보내고, 나는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쓰레기 봉지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골목길 저 편 끝까지 다녀왔다. 영국에서 두어 달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만난 사람도 리디아였다. 공항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녀를 불러내었는데, 오랜만에 만나서 좋아라 하는 티가 너무 났다. 잠시 영어로 대화를 나누자, 내 영어가 더 늘었다고 좋아했다. 이른 저녁이었고, 우리는 근처 시장에서 캔맥주와 소시지를 사서 어딘가 계단에 걸터앉아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함께 갔던 여러 파티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데 나는 그 관계에 적극적이지가 않았다.


한두 번 손을 잡았던 것을 빼면, 나는 이상하게도 리디아에게서 성적인 긴장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예쁘고 쾌활한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를 대하는 내 감정에는, 무언가 있어야 할 것이 빠져 있었다. 나는 리디아를 만날 때마다, 첫 만남에서 보았던 그 찢어지고 구멍 난 검은 스타킹을 떠올리곤 했다. 그것은 섹슈얼하면서도 동시에 불안하고 또 우스꽝스러운 그런 이미지였다. 물론 나는 그 생각을 단 한 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리디아가 그날 밤처럼 감정적으로 격앙된 모습을 보여준 적은 두 번 다시없었고, 그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점차 흐릿해져 갔다. 하지만 내 안에는 어떤 거리감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로 계속 남아있었다. 그 거리감을 좁혀줄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나는 그것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또 이런 얘기들을 하면, 내가 유학까지 가서 데이트나 즐기며 그곳 생활을 한가하게 즐겼던 것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받던 학업 스트레스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내 머릿속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항상 시끄러웠고, 리디아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그런 나에게 조용히 휴식을 주곤 했을 뿐이다.


내가 감정적인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말하는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말이 많거나 빠른 사람들을 많이 좋아하는 법이 없다. 말이 빠르고 많으면 깊은 감정을 느끼기 힘들다. 적어도 말 수 적고 느린 내겐 그렇다. 더구나 내 스페인어는 리디아가 말하는 속도에 비하면 한참 느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내 느린 속도를 가지고 문제 삼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또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얘기만 떠드는 그런 성격도 아니었다. 내가 느릿느릿 이야기를 할 때면, 그녀는 자기 말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운채로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그녀의 빠른 속도가 벅차다고 종종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서너 번쯤 만났을 때, 나는 그녀를 그만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계속 불러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즐거운 감정이 드는 그 순간들을 나는 포기하기 싫었다. 즐거움이라는 것은 순수하기는 해도 비교적 단순한 감정이다. 리디아를 만나면서, 나는 그 즐거움 너머로 무언가가 나타나기를 계속 기다렸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무언가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마음 한편에는 그녀와 자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심리적 간극을 어떻게 좁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을 무시하고 건너뛰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을 것이다. 나는 리디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느꼈다. 잘 모를 때에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도 답일 수가 있다. 그래서인지 그녀와는 그저 친구처럼 섹스리스 데이트가 편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참고로 나는 무성욕자가 아니다. 자신의 욕망 앞에서 쓸데없이 진지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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