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지 않는 꽃
셋.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항상 상대방의 입장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나는 리디아에 대한 나 자신의 감정과 입장에만 집중했지, 그녀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무신경했다. 우스꽝스러운 그날의 해프닝이 있기 전까지는.
마드리드 시내에는 크고 작은 공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날은 월요일 연휴가 붙은 어느 일요일이었는데, 우리는 오전 시간을 집 근처 공원에서 때우기로 했다. 예술사 과제가 많아서 오후 시간은 도서관에서 보낼 예정이었고, 리디아는 다른 약속이 잡혀있었다.
그녀는 얇은 나무로 짜인 피크닉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안에 뭐가 들었냐고 묻자, 뚜껑을 틱 열어서 안을 보여주었다. 손수 만든 샌드위치가 있었고, 작은 레드 와인 한 병, 그리고 하몬과 치즈가 있었다. 우리는 공원 그늘진 곳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그것들을 먹으며 찬공기를 즐겼는데, 나는 '정말 고맙지만 다음번에는 이런 걸 따로 준비하며 시간 쓰지 말라고' 말했다. 너무 정중하게 말했나 보다. 리디아의 얼굴에 서운한 표정이 잠시 스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특유의 쾌활함을 다시 보여 주었고 나는 그 일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학교 수업시간에 들은 영화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리디아는 그중에서 아는 제목을 하나 듣더니, 자기가 그 영화 DVD를 가지고 있으니까 빌려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럼 다음 주에 들릴까? 그렇게 리디아의 아파트에 들러 영화를 빌리기로 약속을 잡았다.
다음 주 그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일 저녁이었다. 리디아는 회사를 퇴근하고, 나는 그날도 도서관에서 과제를 마치고, 우리는 근처 시장 한구석에서 와인에 초리소를 시켜 먹고 있었다. 나는 배가 고팠고, 리디아의 말에 고개를 계속 끄덕거리며 아무 생각 없이 계속 먹고 마시고 있었다. 뭐 좀 더 시킬까? 내가 말하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쾌활하던 리디아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지는 것 같더니, 갑자기 질문을 하나 던졌다.
“한국 사람들은 보수적이야?”
글쎄, 내가 둔감한 편이긴 하다. 그래도 그날은, 그녀가 실제로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처럼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질문에 베스트 답변을 찾기 위해, 그 짧은 순간 말을 고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리디아처럼 말이 빠른 여자 앞에서는. 그래서 그냥 팩트라고 생각되는 걸 하나 골라서 대답을 했다.
“응 아마도 그럴걸. 유럽 사람들에 비하면 더욱 그렇지.”
리디아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는 것을 언뜻 본 것 같았다. 그녀는 계속 다른 얘기를 이어갔지만, 포크를 쥔 손동작이 어딘지 조금 급하다고 느껴졌다.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아마도 그 말 뒤에 내가 덧붙일 수 있었거나 혹은 덧붙여야만 했던 다른 말들이 여러 가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를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그녀의 아파트를 향해 함께 걸어갔다. 골목길을 지나 아래층 현관에 도착했다. 위층으로 올라가 아파트 현관문을 밀고 함께 들어갔다. 벽난로 앞에 서서 뭔가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날 영화만 받아서 일찍 집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빌리기로 했던 영화에 대해 다시 묻자, 그녀가 선반 위를 뒤지더니 DVD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 영화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아르헨티나 영화였던 것 같은데, 나는 그 영화를 빌려놓고도 보지를 않았다.
그때였다. 그 DVD를 내 손에 건네주던 순간, 그녀가 갑자기 소리치듯 말을 뱉었다. 그녀 특유의 따발총 같은 말투로.
“섹스가 나와, 섹스가. 조심해!”
언뜻 농담 같기도 했지만, 나는 그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단숨에 눈치챘다. 왜냐하면 농담 뒤에는 항상 뒤따르던 리디아 특유의 깔깔거림이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아까의 내 말 때문에 나를 비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또는 용수철 튕기듯 나를 때리며 저만치 튕겨내던 그 비슷한 어떤 차가움.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고, 대신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은 많이 경솔했던 것 같다. 리디아는 그녀답지 않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잠시 후, 조금 어색하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집을 향해 걸었다. 내가 머물던 그 극장 옆 아파트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기도 한참 전에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고, 발길을 다시 되돌렸다. 무엇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다른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다시 층계를 올라, 닫혀 있던 리디아의 빨간 벽 아파트 문을 다시 두드렸다.
하지만 리디아는 문을 다시 열어주지 않았다.
어떤 남자들은 이런 나를 두고 비웃을 것이다. 눈앞의 기회도 놓쳐버렸다면서. 하지만 이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남자가 욕망을 발현하는 모습이 항상 똑같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말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