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8년 전 이 글을 처음 썼을 때, 나는 시드니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고, 어쩌다 보니 영주권 신청을 리젝 당했다.
처음 시드니 도착한 것도 상황에 떠밀려서였다. 직종 자체가 이직이 잦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타이밍이 나빠 남들에 비해 변화가 심했던 것은 사실이다.
영주권 리젝 소식을 듣고, 그 씁쓸함을 위스키 한 병에 섞어 통째로 비우면서 며칠에 걸쳐 이 글을 썼다.
원래는 두 개의 다른 글이었다. 서로 겹치는 내용이 많아 문단을 섞고 문장을 다시 썼다. 아마 살아가면서 두 번은 쓸 수 없을 것 같은 내용의 글이다. 잘 썼다는 말이 아니라, 그때 그 순간 그 감정으로만 쓸 수 있었던 글. 비록 과장된 어조이지만, 내게는 진실된 글이다.
하지만 불과 몇 개 월 후 상황은 반전된다. 인생이란 재밌는 것이다. 그 경험에 대한 글은 나중에 따로 썼다.
그러다 어느 날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는 느낌이 문득 들었고, 안정적이었던 그 회사를 제 발로 떠났다. 그 후 코비드가 오고, 다시 떠밀리듯 도시를 두어 번 바꾸고, 다시 어디론가 멀리 가고 싶어서 나라도 다시 옮겼다.
이쯤 되면 내가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잘 안다.
새로운 도시에 온 지도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한국인 여성분을 만났다. 내 상상력을 자극하는 타입을 만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말수 적고 내향적인 성격이었고, 나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접근해 갔다. 하지만 아뿔싸, 컨디션 체크를 소홀히 했다. 이미 파트너가 있는 여자였다. 내가 무엇을 착각했던 걸까. 그렇게 데이트 신청을 거절당하고 자조적인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있는데, 그 여성분이 말한다.
자기는 이미 모든 관계가 확립되어 있어서 심지어 친구조차도 새로운 인연을 만들 필요를 못 느낀다고.
그 말을 듣고 문득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과의 거리감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참 생각했다. 내가 어디선가 홀로 떠돌고 있을 때, 누구는 한 곳에서 이처럼 자신이 지켜가야 할 것들을 묵묵히 쌓아가고 있었겠구나 하고.
도시나 나라를 한번 옮길 때마다 난 심사숙고하곤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항상 합리적인 근거를 찾으려고 했다. 그럴듯한 이유는 항상 있었다. 생존, 기회, 경력, 변화, 성장.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합리성이 아니라 내 성격이나 본능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기어이 한 자리에 못 박는다. 가령 외국 체류 중 비자에 문제가 생기면 서류를 위조하거나 위장결혼을 해서라도 한 자리에 남는다. 그런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처럼 한 자리에 남으려는 노력은 얼마나 기울였는가 하고 반성해 보았다.
노마드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또는 삶의 무게 속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훌훌 떨쳐버리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마음 한 구석에서 정착을 갈구하는데 그 방법을 몰라 그 모순 속에서 헤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한 셋쯤 만들고, 빚을 내서 집을 사고, 불안한 노후에 대해서 걱정하는 시간을 늘리면 된다. 하지만 삶에서 그것들 만큼은 피하려고 하는 걸 보면, 나는 여전히 어디론가 다시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물론 결국은 삶에 대한 방식의 차이라고 여기고 싶다.
만일 그것이 내 본능 같은 것이라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계속 걸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둘 것은 나는 방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가끔은 내가 길을 걷는 것인지, 길이 나를 걷는 것인지 모를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