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언제였는지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십 대가 끝나갈 무렵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내겐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앞날이라는 것은 스위치를 켜도 켜지지 않는 검은 스크린 같은 것이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고,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런 상상도 안되었다. 내가 마주한 이 세상은 더없이 완벽하고 그 자체로 빛이 나 보였다. 하지만 그 앞에 선 빛 꺼진 나 자신은 너무나도 작고 초라했다. 어릴 때부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오랫동안 시달렸던 나는, 그 무렵 죽고 싶다는 생각을 늘 달고 살았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죽고 싶었다면 아마도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내가 일찌감치 죽지 못했던 것은 삶에 대한 욕망이 죽고 싶다는 감정을 넘어섰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 저 밑바닥에 흐르는 본능 같은 것 말이다. 아무튼 아직은 살면서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온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백남준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절대로 좋은 아들도, 좋은 남편도, 좋은 아빠도 장차 되지 못할 그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생이라고 스스로 폄하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이 주는 경이로운 두근거림까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착각하곤 한다.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을 그저 경험하기 위해 태어난다. 물론 오랜 인류학적 관습들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문화적인 굴레를 지우고, 당신은 아마도 태어났던 그 순간부터 이미 어떤 역할놀이 속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떠하게 살아야 할 그 어떤 의무도 본질적으로는 없다. 그저 보고 듣고 걷고 웃고 울며 숨 쉬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삶일 것이다.
내가 아직은 죽고 싶은 마음이 그다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했을 때, 나는 외국에 나가서 남은 인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어느 가을날, 그렇게 해서 나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어릴 때부터 동경했던 한 나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남들이 코피 흘려가며 토익점수를 올릴 때, 나는 도서관에 파묻혀 쓸데없는 책장만 넘기고 있었다. 세상살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개인적인 관심거리들이었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외국어를 공부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언어에 대한 감각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일단 시작만 한다면 외국어도 쉽게 배울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한 자기기만의 근거는 고작 국어 실력이었다. 언어감각은 다 통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과감하게 외국땅에 도착하고 나서, 외국어 학습의 어려움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나는 이미 돌아갈 곳이 없었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 알았더라면, 내가 태어난 나라를 떠날 생각이나 했었을까?
아마 일생일대의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둘.
그보다 기억을 한 참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아마도 초등학교 5학년 때였을 것이다.
'엄마, 쟤는 방랑벽이 있나 봐.'
친구 하나가 나를 두고 자기 엄마한테 말했나 보다. 그 친구 엄마는 이 얘기를 우리 엄마한테 했고, 우리 엄마는 그 얘기를 다시 내게 전했다. 뭐, 대단한 얘기는 아니다. 툭하면 몇 시간씩 걸어서 여기저기 뿔뿔 돌아다니는 내가 그 친구 눈에는 비정상으로 보였나 보다. 혼자 걸어서 한강을 다녀오거나, 이 동네 저 동네 기웃거리거나, 그 당시 삼성동에 있던 서울문고까지 몇 시간씩 걸어가서 책을 보고, 다시 몇 시간씩 걸어서 돌아오곤 했었다. 글쎄,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내겐 별일 아니지만, 초등학생들에게는 그것도 나름 모험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 친구가 그런 말을 자기 엄마한테 했을 것이다.
정말로 내겐 타고난 방랑벽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내친김에 작은 기억 하나만 더 이야기해 보자. 3살 때였을 것이다. 부모님이 은행에 가실 때 나를 데리고 갔었는데, 잠시 한눈 판 사이 내가 사라져 버렸다. 눈앞이 캄캄해지신 부모님은 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었지만, 나는 이미 은행 안에 없었다. 부모님은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오셨는데, 그때 길 저 쪽에서 어떤 아저씨가 나를 어깨 위에 목마 태우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걸 발견하셨다.
그 꼬마는 그저 아장아장 걸어서 이 세상을 탐험하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가 안 보인다고 울지도 않았다. 인파 속에서 어린 꼬마를 발견한 그 현명하신 아저씨는 내가 부모를 잃어버렸음을 즉각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부모가 발견하기 쉽도록 나를 높이 목마 태우고 내가 오던 방향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그때 탐험했던 세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순간 내가 붙잡고 있었던 그 아저씨의 양쪽 귀가 손에 닿았던 감촉, 뒤로 스쳐가는 건물과 거리의 풍경들, 길 저편에서 나를 발견하고 발을 동동거리며 손을 흔들던 부모님의 모습 등이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게 혼자 뿔뿔 돌아다니길 좋아하던 아이는 이제는 자기가 태어난 나라마저도 떠났다. 한국인이 거의 없는 나라에서 외국 생활을 시작했다. 언어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해 왔던 내가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면서 떠듬떠듬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한두 해가 지났을까. 어느 날 문득 일기를 쓰다가, 한때 내 정신을 가득 채웠던 거칠고 격렬했던 관념들이 어느새 많이 녹아내렸음을 깨달았다. 먹먹한 느낌이 들 정도로 한국어를 잊어버림과 동시에 그와 결합되어 있던 많은 관념들도 허공으로 증발해 버린 것이다. 언어란 그런 것이다. 한국에서 가졌던 삶과 사고방식이 그대로 이어지길 원하지 않았던 나는 그것을 아주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다. 외국에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만족감은 잠시, 외국에서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기나긴 현실이었다. 해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외국생활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특히 의사소통이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우선 자아가 위축된다. 자아를 내려놓는 법을 배우기 위한 좋은 연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서툰 언어 때문에 자존심을 구길 때마다 자신이 한심하고 초라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어느 날은 영어가 좀 트이나 싶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일 뿐, 다음날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사람들이 무슨 알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전부 웅얼거림으로 들린다. 그날의 컨디션이나 집중력이 따라 실력이 오르내리는 것이다. 하루는 제법 괜찮다가도, 하루는 윗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실수가 생긴다. 따라서 늘 긴장하고 살아야 한다. 외국에서의 삶은 물아래에서 잠수하는 것과 같다고 늘 느껴왔다. 숨도 막히고, 무거운 수압이 온몸을 늘 짓누른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싫었다. 비록 숨은 조금 막혀도 이곳에서는 어떤 역할이나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었다. 아무리 끝이 안 보이는 길 위에서 아무리 불확실성을 마주해도 내 삶은 여기 길 위에 있지, 다시 한국에 돌아가서 정해진 틀에 맞추어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기대했던 만큼 내가 어학에 재능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 현실적인 어려움을 깨닫고 나서도 내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조금씩이나마 열리는 것 같은 어떤 가능성이었기 늘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답답해도 여기서는 미래가 열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날마다 찔끔찔끔 늘어나는 언어 실력과 함께.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미 너무 멀리 걸어왔다고 생각했다. 멈추어 설 수 없고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만 포기할까 싶다가도 포기하기를 포기하곤 했다.
셋
그렇게 혼자서 뿔뿔 돌아다니길 좋아하던 아이는 자기 나라를 한 번 떠났던 것도 모자라 이제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 그러고 보니 참 많이도 돌아다녔던 것 같다. 남들처럼 배낭 하나 둘러매고 백여 개국을 여행하고 그 경험으로 책을 쓰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많은 장소에서 살아왔다. 사는 것과 여행하면서 잠시 방문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체험이다. 한 도시에 최소 두 달 이상 머물러 본 경험만 따져보자. 서른 살 이후 한국 빼고 5개국 7개 도시가 된다. 아마도 적지 않은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 그러고 싶어서 그랬으랴. 내가 가진 방랑벽을 주체하지 못해 계속 나라와 도시들을 옮겨 다녔던 것이 아니었다. 살다 보니 어쩌다 사정이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만일 방랑이 내 운명이라면 그 말만큼은 맞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하늘이 ‘넌 이곳을 떠나야만 해.’라고 말하듯 가는 곳마다 오래 머물지 못할 사정들이 생기곤 했다. 학교문제로 학업을 끝마치지 못하거나, 대사관 파업으로 비자발급이 늦어지거나, 국가 부도 상태로 취업길이 막히거나, 정치적 상황 때문에 회사에 잡혀있던 프로젝트가 줄줄이 취소되거나, 또는 이민법이 갑작스럽게 바뀌면서 영주권 신청이나 비자 발급에 문제가 생기거나. 어쩌면 그렇게 운이 나쁠 수가 있는지, 마치 내가 그것들을 몰고 다니는 것처럼 내가 가는 곳마다 정말 많은 일들이 생기곤 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또 얼마나 운이 좋은지, 언제나 또 다음 기회를 얻어 새로운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운이 좋았다. 언젠가 그 새옹지마 이야기도 한번 글로 써보면 좋을 것이다.
아무튼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경험들을 했고, 또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내가 배운 진부한 교훈 하나만 얘기해 보자. 인생의 수많은 일들이 당신의 노력 여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다. 당신이 재능이 없거나 노력이 부족해서 일이 안 풀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회구조 탓만 하면서 손가락하나 까닥하지 않거나 정말 실력이 없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만. 아무튼 기본적인 조건들을 다 갖추고 당신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인생은 당신이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을 당신에게 마구 던져준다. 그러한 실패의 경험이 자꾸 반복되면서 나는, 세상 속의 작은 티끌뿐일 존재가 가져야 할 겸허함에 대해서 정말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한약방을 하셨던 증조할아버지를 비롯해서 외가 쪽 집안에 의사들이 많다. 그래서 어머니와 외갓집 가족들은 나도 의사가 되기를 강하게 바랬고, 가끔은 내 진로에 대해 직접적으로 압력을 넣기도 했었다. 의사였던 이모부가 날 설득하기 위해 찾아와서 같이 잠들면서, 의사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밤새 설교들 들었던 적도 있다.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나는 의사라는 직업이 끔찍이도 싫었다. 하루 종일 그 좁은 곳에 앉아서 사람만 치료하는 일이 뭐가 재미있을까. 내가 의대에 갈 정도의 공부머리가 없었던 것도 다행이었다. 내가 왜 의사가 되어야만 하냐고 되물으면 어머니나 외가식구들은 안정적이고 존경받는 삶을 그 이유로 들곤 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대답하곤 했었다.
"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싶어요."
결국 어릴 적 소망대로 파란만장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찌감치 돌아가신 어머니가 하늘에서 내가 지금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 어쩌면 가슴 아파하실지도 모르는 일이다.
파란만장이란 단어는 어떤 로맨틱한 미화가 들어있는 것 같아서 이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또 나는 별것 아닌 나의 삶에 그런 식의 단어를 붙여가며 미화하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양심은 있다. 비록 방랑은 할지언정 방황은 하지 않는다. 또 방황을 파란만장함으로 착각하지도 않는다. 어릴 적 철없던 소망과는 다르게 막상 변화가 심한 삶을 직접 겪어보면 항상 유쾌하지만은 않다. 끊임없이 사람들과 헤어져야만 한다. 집이나 차를 사기도 힘들다. 계속 이사 다니느라 돈이 안 모인다. 마음에 드는 가구가 있어도 사지를 못한다. 내년이면 다시 버려야 할지도 모르니까.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막연한 불안감은 항상 따라다닌다. 친척 어르신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해 소개팅을 받았다. 상대가 마음에 들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문자를 보냈다. 물론 답장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는 이런 식의 삶의 스타일을 계속 유지할 것 같다. 계속되는 옮겨다님과 변화에 스스로 지쳤던 것일까? 몇 년 전 스스로 어떤 역설적인 선언 같은 것을 한 적이 있었다.
앞으로. 절대로.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넷.
유럽과 북미와 남미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공부하고 연애하고 일하고 살아본 경험들은 내게 세상의 다양성에 대한 시각을 제공해 준 것 같다. 에스파냐에 대한 인상적이었던 경험 하나. 그곳에서는 아무도 자신의 경험이나 삶의 방식을 일반화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언어적 진술을 한 다음 언제나 그 끝에 덧붙이곤 했다. 가령 '적어도 여기 마드리드에서만큼은 그래'라고. 그것은 일종의 관용구처럼 그들의 언어습관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스파냐는 4개의 다른 언어가 공존하는 4개국이 정치적으로 통합된 국가가 아닌가.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다양성과 상대성에 익숙해져 있었다. 사람이 겪는 많은 경험들이 일반화되기 힘든, 실은 문화적 지역적 특수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들은 자연스레 체득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비좁은 경험만으로 세상만사를 규정하고 오지랖을 펼치는 한국의 꼰대문화가 그곳에는 없었다. 외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간혹 한국인 꼰대들을 만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보통은 한 도시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국을 벗어나도 겸손해지기보다는 더욱 기고만장해진다. 여기까지 와서 살아봤는데도 인생 별거 없더라는 식의 진부한 레퍼토리. 그들은 얼마나 다양한 문화와 얼마나 다양한 삶의 방식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모른다. 삶이 별거 없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별거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지금도 나는 많이 걷는 편이다. 어릴 때처럼 이 동네 저 동네 떠돌아다니지는 않지만, 이틀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산책을 나간다. 걷고 싶어서 걸을 때는 나도 좋지만, 가끔은 지치기도 하고 걸음을 멈추고 한차리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만 걷고 싶어도 계속 걸어야 하는 순간들도 있는 법이다. 백남준은 자신을 유목민족의 후예라고 생각했다고 하던데, 내게도 그런 유목민적인 유전자가 핏줄 속에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가끔은 내가 걷고 싶어서 걷는 것인지, 세상이 나보고 계속 걸으라고 총부리를 들이미는 건지 모를 때도 있다. 그렇게 가끔 걷기에 지칠 때면 백남준을 생각해 본다. 백남준은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에 촌스러운 일본식 영어발음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작품활동을 했다. 나는 흉내도 내지 못할 위대한 정신력의 소유자.
정말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이 도시에서 나는 얼마나 더 머물 수 있을까. 다른 한국인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이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씩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보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이곳. 언젠가 영국인 사장이 위스키잔을 기울이며 농담 삼아 말했다. 우리 회사는 절반의 영국인들과 상당 수의 프랑스인들과 약간의 호주인들 그리고 한국인 한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현지인도 자리 구하기 힘들어하는 좋은 회사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이 행운. 날마다 원어민들에 둘러싸여 외국어로 일할 수 있는 이 행운. 물론 영원한 것은 없다. 얼마 전 회사해서 영주권을 신청해 주었는데, 어이없게도 리젝 당했다.
정권이 바뀌면서 이민법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벌써 두 번째 영주권 리젝이다. 갑자기 슬픔이 몰려온다. 이 도시에 오래 머물면서 나도 남들처럼 가정도 이루고 하면 어떨까 하고 잠시나마 꿈을 꾸었다. 역시나 나는 꾸어서는 안 되는 꿈이었다. 일을 잘하고 있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계속 비자를 발급받아 나를 붙들어 두려고 하겠지만 결국 언젠가는 떠나야만 할 것이다. 내년에 한 번 더 기회가 올 것 같기도 하지만, 상황을 보니 그것도 힘들 것 같다. 또 다른 나라로 가게 될까. 또 다른 언어를 배우게 될까. 그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낙담하기도 잠시. 새로운 모험에 대한 흥분감이 몰려온다. 차리리 모든 것이 틀어져서 언제나 그래왔듯이 상황이 나를 새로운 여정으로 내몰기를 내심 바라기도 한다.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게 될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끼어들수록 그 여정은 더 짜릿할 것이다. 나도 나이를 먹어가니 아주 엉뚱하게 스리랑카로 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자리에 계속 머물지 않으리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그곳이 어디가 되었던 난 이미 준비가 되어있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해 다시 새로운 생활을 꾸려갈 준비.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기후에 적응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준비. 그것이 어디가 되었던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규칙을 받아들일 준비를 이미 마쳤다.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녀 본 덕분이다. 그것은 가슴 설레는 모험일 뿐이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진 것들을 잃어버릴까 두려움 때문에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가진 것이 처음부터 많지 않다면 두려울 것도 없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 없는 마음에서 자유로움이 나온다. 자유로움. 내가 유일하게 추구하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자유일 것이다. 십 대 시절부터 다른 가치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나는 행복이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단어에는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돈, 안정, 성공, 친구, 사랑 그 모든 단어들에 시큰둥했지만 자유로움이라는 단어만큼은 어제나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나이는 먹어가고 딱히 모아둔 돈도 없고 어쩌면 빈털터리로 길 위에서 평생 외국어만 더듬거리며 배우다가 죽게 될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미성숙한 아이들처럼 더듬거리며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렴 그런들 어떠하리. 백남준이 수십 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그의 입에서 더 이상 쓰이지 않던 예스러운 하오체가 튀어나와 모두들 경악했더라지. 언어란 그런 것이다.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는 나는 그가 정말로 존경스러울 뿐이다. 주위사람들이 그의 촌스러운 일본식 영어를 못 알아들어 곤혹스러워하곤 했었단다. 그가 언어적으로 얼마나 고립된 삶을 살았을까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그는 한 번도 언어적으로 완벽했던 적도, 언어적으로 품위를 구사했던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모든 곳에 있었고, 모두가 그의 존재 가치를 인정했다. 물론 그의 인생은 그 자체로 예술이었고, 나는 그처럼 똑같이 품위 있는 삶을 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 삶이 아무리 초라할지라도 그것을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길 위에서 성장해 가는 중일 것이다. 그 길 위에서,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 안 하는 대범함도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일이 잘 안 풀리면 한숨 정도는 쉰다, 무엇보다도 그 길 위에서, 세상 앞에서 무기력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도 배웠다. 물론 그것이 꼭 연민만은 아니다. 대범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으면 먼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놓아버려야만 가능할 것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작은 것들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안정감을 취하려 들면 그것들마저 놓칠까 두려움에 떠는 새가슴이 될 뿐이다. 자유롭고 싶으면 그 새가슴을 극복해야 한다. 손아귀의 힘을 풀고 가지고 있는 것들을 놓아버려야 한다. 가장 안전한 길은 무엇일까. 남들이 또는 세상이 규정해 주는 대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은 조금 지루할지는 몰라도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은 없을 것이다. 내 머리로 생각하지 않으니까. 아무리 불안감에 몸이 떨려도 한 번쯤은 자기 길을 걸어보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걷다 보면 그 끝은 어디일까? 아무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그저 길 위에서 쓸쓸하게 죽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많이 걸었던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침대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아야만 잘 살아온 인생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것은 그냥 문화적 관습이 주는 해피엔딩에 대한 어떤 관념일 뿐이지, 그것이 삶과 죽음에 대한 본질적인 측면은 아닐 것이다. 유목민들의 죽음에 대한 관념은 다른 문화권의 그것과 조금 다를 것이다. 어차피 길 위에 나서 길 위에서 죽는 것이다. 그래서 이상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문득 몇 달 전에 보았던 로건 <Logan, 2017>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생각난다. 노화와 죽음에 관해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너무나 잘 만들어진 영화다. 이 정도의 진지한 주제의식을 가진 영화가 이 정도의 퀄리티를 가지고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독하게 슬픈 이 영화를 한 번 보면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등장인물 모두가 쓸쓸하게 길 위에서 죽어가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견뎌온 삶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말이다. 아무튼 나는 계속해서 걸을 것이다.
그저 느긋이 산책하듯. 그저 꾸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