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좋아해서 경건함인가, 경건해서 신이 좋아하는가
신이 좋아해서 경건함인 것인가? 경건해서 신이 좋아하는 것인가?
이 질문은 ‘경건함이 무엇인지’를 묻는 정의의 문제다.
정의의 정의는 무엇일까?
내가 말하는 정의도 완전한 정의는 아니겠지만, 최선을 다해 말해 본다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언어로 표현하려는 시도라고 하겠다.
예를 들어 보자.
태양을 언어로 완벽히 표현한다면 “태양은 태양이다”라고 해야 100%를 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의미 없는 일, 동어 반복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설명하고 싶어진다.
태양은 태양계의 중심에 있는 항성이고, 크기는 어떻고, 무게는 어떻고, 무엇으로 이루어졌고, 온도는 어떠하다…. 우리는 태양의 특성으로 말하려 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것은 특성일 뿐, 그 사물 자체를 말한 것은 아니라고.
태양은 뜨겁다.
태양은 거대하다.
태양은 밝다.
‘뜨겁다, 거대하다, 밝다’는 형용사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형용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명사, 곧 “태양은 무엇이다”라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에우튀프론의 딜레마는, 한편으로 본질과 성질—비유하자면 명사와 형용사—를 가르는 질문이기도 하다.
한번 상상해 보자. 형용사가 사라지고 명사만 남은 세계를.
너는 아름답다 → 너는 아름다움
너는 착하다 → 너는 착함
너는 귀엽다 → 너는 귀여움
너 = 아름다움
아름다움 = 너
너 = 착함
착함 = 너
너 = 귀여움
귀여움 = 너
세상에는 너와 나만 남고, 나머지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듯, 모든 초점이 너와 나에게 모인다.
아기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아직 세상의 경험이 없고, 누구의 손도 잡아 본 적이 없고, 누구와도 대화해 본 적이 없는 그때, 아기에게 어머니는 곧 모든 명사가 된다.
어머니는 집.
어머니는 위대함.
어머니는 신.
어머니는 세상.
어머니는 따뜻함.
아기에게는 대부분의 명사가 어머니가 될 것이다.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말도 결국 신과 나 단둘이 마주 선 상태일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모든 좋은 것을 뜻하는 명사는 신에게로, 모든 부족함을 뜻하는 명사는 사람에게로 간다.
위대함은 신입니다.
사랑은 신입니다.
선함은 신입니다.
용서는 신입니다.
부족함은 사람입니다.
어리석음은 사람입니다.
잘못은 사람입니다.
죄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좋은 명사들을 선물처럼 붙여 주는 일도 좋겠다.
그건 이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과 나만 남겨두고 온전히 상대에게 세상을 선물하는 속임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