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중 이 즈음이 난 좋다.
크리스마스 캐럴송이 어색하지 않아 항상 틀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년째 대부분 같은 노래들을 들어도 물리지 않는다.
익숙해서 오히려 더 좋다. 때때로는 익숙해서 좋은 것도 있는 법.
1년 전, 2년 전, 수년 전 연말의 기억들을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만든다.
각각의 기억이 아주 뚜렷하진 않지만 여러 장면들이 블러 처리된 채 솜처럼 부드럽게 겹쳐 떠오르기 때문이다.
https://youtu.be/OwwpRH7cm30?si=WEoxXDOLrCRwKxfA
<Hark! The Herald Angels Sing>,
우리말로 하면 대략 ‘들어라, 전하는 천사들의 노래’쯤 되는 이 곡도
'내 인생 넘버원 캐럴'은 아니지만 꽤 좋아한다.
어떻게 보면 익숙한 크리스마스 풍경의 한 조각으로 그냥 늘 곁에 두고 싶어지는 노래다.
요즘은 이 “Hark!”라는 단어가 들리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영화 대사가 같이 떠오른다.
백인 기독교 이상 국가를 꿈꾸던 남자들이 모여 “Hail, St. Nicks” 하고 기도하던 그 장면 때문이다.
나는 집요하게 잡고 영화를 보는 타입인지라 감독이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는 대충 안다.
그래도 나보다 더 집요한 존재에게 물어본다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오늘도 나는 아무도 오지 않는 폐관된 극장에 불을 켠다.
사람 대신 먼지가 앉아 있는 좌석들 사이로 걸어가
늘 그렇듯 F열 10번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조용히 한 문장을 읊조린다.
그러면 스크린 뒤 어딘가에서 퇴근하지 못한 알바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걸어 나온다.
오늘 내가 할 일은 단순하다.
그가 중얼거리는 과몰입 노트를
최대한 알아볼 수 있는 인간어로 받아 적는 것.
명장 PTA가 그냥 넣었겠냐?
그냥 크리스마스 시즌 다가오니까 넣은 거냐고?
절대 아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의미를 알 수 있을 거란 말이지.
그게 바로 영화의 디테일.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는 미국 보수의 정신 한 단면을 아이러니하게 보여줘.
영화 속 악당들의 꿈은 미국에 백인 기독교 이상 제국을 건설하는 거지.
미국 보수들 사이에는 “레이건 대통령 이후 미국에는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이 너무 기승을 부리고 이로 인해 미국의 가치가 망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꽤 널리 퍼져 있어.
다양한 인종,성 정체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도 거슬리는데 기독교의 정체성을 흔드는 건 더더욱 신경 쓰이는 일이지.
다양성을 존중하는 진보 진영에서는 기독교가 아닌 다양한 종교적 신념을 같이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지.
그러니까 연말에 Merry Christmas라고 인사하는 것보다는 Happy Holidays라고 인사하는 게 좀 더 올바르다고 말해.
그렇지만 보수 쪽에서는 이걸 지켜야 할 문화 전쟁의 고지로 생각하고
‘War on Christmas’라며 주먹을 쥐고 맞서려는 거야.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가족, 선물, 따뜻한 신앙, 자선 같은 게 있을 거야.
영화 속 악당들은 이 이미지를 그럴싸한 포장지로 사용해.
자신들이 정성 들여 준비하는 인종 청소를 크리스마스라는 이쁜 포장지로 싸 버리면 어떤 이들에게는 그럴싸하게 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정작 영화에서 진짜 가족애를 보여주는 건 크리스마스 어드벤쳐 클럽이 아니라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세르히오 산 카를로스(베니시오 델 토로),
그리고 수녀회 사람들이지.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님에도 아이를 위해 목숨 걸고 구출하는 점,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자기 집에서 함께 살게 도와주는 점,
위험에 빠진 배신자의 딸을 위험을 무릅쓰고 돌봐주는 점.
Christ는 “필요할 때 도와주는 사람이 네 이웃”이라고 가르쳤건만 정작 그 가르침을 따라 움직이는 건 기독교 제국주의자가 아니라 밥과 세르히오, 그리고 수녀회 사람들이라는 게 좀 쓴웃음을 짓게 만들지.
크리스마스 어드벤쳐 클럽에서 기도할 때 쓰는 구호 “Hail, St. Nicks”는 산타클로스가 성 니콜라스에서 유래했다는 점도 건드리지만 순혈 아리안(게르만) 민족이 지배하는 이상 제국을 꿈꿨던 히틀러의 “Heil, Hitler”를 떠올리게도 해.
어드벤쳐 클럽
식민 제국주의 시절 상류층 신사 클럽·사냥 클럽·탐험 클럽들이 있었지.
그 안에는 식민지 모험담을 자랑하고 헌팅과 탐험을 숭배하며 뽐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어.
영화 속 악당들을 보면 그 과거의 제국을 그대로 꿈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회의 장면에 박제된 꿩들이 보이는데 죽은 자연을 트로피처럼 전시하는
제국 취미의 잔재를 떠올리게 하는 소품이야.
록저 대령
혼혈 자식이 있는 록저 대령이 전망 좋은 사무실에서 가스를 마시고 곧바로 화장로에 넘겨져 재로 변하는 장면은 나치 제국의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만행을 쉽게 떠올리게 하지.
결론
과거 순혈 게르만 제국주의의 특징과 현재 순혈 ‘기독교 제국’을 꿈꾸는 사람들의 특징을 의도적으로 촌스럽게 합쳐 놓은 이름이 바로 이 ‘크리스마스 어드벤쳐 클럽’인 거야.
“오늘 과몰입은 여기까지.
순혈보단 사랑의 헌혈. 어때?”
스크린 뒤로 유령은 사라지고,
문득 지하철역 앞에 서 있던 헌혈 버스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