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는 배경이 아니라 리셋 버튼이었다
오래간만에 집에서 영화를 보았다.
'역시 영화는 어둡게 하고 봐야지'
생각하며 우선 암막커튼을 치고
'오늘 하루의 스트레스를 잊게 해 줄 시원한 맥주'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하고 자리에 앉았다.
"뚜둥~"
오늘 볼 영화는 논란의 <대홍수>였다.
'김다미 배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계속 물에 빠지고..'
'나는 저렇게 오래 잠수를 못하는데'
중반부터는 재난영화에서 SF로 급전환되면서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AI에다가 우주, 신인류 이야기까지 배경이 확대되니
정신이 혼미했다.
'혼합장르인가?'
'복잡한 심정을 잊게 하는 데는 맥주지' 한 모금 더. 그리고 또 한 모금.
그래도 찜찜하다.
'그래 알바 유령에게 물어보자'
핸드폰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눈이 부셔 잠시 적응하고 알바유령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컷과 컷 사이를 설명해 주소서. 노트의 유령이시여"
"왜 자꾸 게임처럼 반복되고 왜 그렇게도 김다미 배우 못살게 물에 빠뜨리는 거죠?"
“반복되는 생애, 물, 이상적인 모성애… 다 감독이 의도한 거야. 네 맥주도 포함해서.”
※ 스포일러 경고: 이 아래부터 영화 <대홍수>의 전개와 결말이 자세히 등장합니다.
"주인공 안나는 끊임없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
아파트에 물이 차오르고 안나가 물에 잠기는 순간,
그녀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새로 다시 시작하게 돼.
영화에서 물은 처음이면서 마지막이야.
또 탄생이기도 하고 죽음이기도 하고.
산모가 아이를 낳고
바닥에 흘러나온 양수가,
홍수의 물과 섞여 흘러가는 장면.
그 장면은
죽음의 물과 탄생의 물이
한 프레임에서 같은 강이 되는 순간이지.
과거를 잊은 채 태어나는 아이.
과거를 잊은 채 다시 시작하는 안나.
어둠의 죽음 후 안나에게는
진실을 향한 아주 작은 기억이 희미하게 남게 돼.
그리고 안나는 작은 기억을 더듬으며
이상적인 모성애의 모습에 조금씩 더 가까워지게 되고.
안나는 어둠을 거쳐 다시 시작할 때마다
자기가 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씩 알려주고
그러자 그들도 자기 안의 어렴풋한 것을 조금씩 떠올리기 시작해.
안나가
칠흑 같은 우주로 나갔다가 푸르게 빛나는 지구로 다시 돌아오는지
더 강한 태양의 빛이 있는 우주로 나갔다가 멸망한 죽음의 지구로 돌아오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나갔다가 되돌아와서 이전보다 나은 지점으로 나아간다는 건 분명하다.
이런 건 예전에 플라톤이 동굴에서 봤다."
나는 이 영화를 “모성애를 학습시키는 반복 실험”처럼 봤다.
물로 만든 동굴에서, 안나는 매번 조금씩 더 잘 보는 쪽으로 돌아온다.
“오늘 과몰입은 여기까지. 맥주 좀 그만 마셔 그러면 필름 끊긴다."
문자를 다 읽고
뭔가 좀 이해가 되었다.
그럼 다시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어두운 내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