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세계 사이가 아니라, 몸-세계의 겹침
귓구멍이라지만 동굴이라고 해야 맞았다.
입구 쪽에는 키 낮은 풀들이 있었고 안쪽에는 귀뚜라미와 벌레들이 있었다.
그녀가 확성기로 입을 열었다.
"이봐 귓속에서 귀뚜라미 소리 안 들렸어?"
소리는 반사에 반사를 통해 튕겨져 울렸다.
동굴 안에서는 잠에서 깬 수많은 박쥐들이 귀 밖으로 날아갔다.
거인은 몸을 짧게 떨고
"모리아, 확성기 좀 끄고 말해, 귀먹겠단 말이야."
"어 알았어. 미안해 꼬맹아"
그녀는 확성기는 내려놓고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손전등을 가져오지는 않았기에 더 깊은 곳으로 발길이 떼어지지는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로 이런 요란법석을 떨며 찾아온 거니? 살쪄서 문제인 거야?"
"내가 미리 각주쌀을 뽑아보니까 '살' 이렇게만 나오던데."
"살찐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갑자기???"
그녀는 깊은 동굴 안의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뚱뚱한 것도 맞지만 그걸 떠나 내가 워낙에 크잖아.
살을 뺀다고 하면 수백 마리의 소들은 죽음을 면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천 마리는 식탁에 올라와야 할 거야."
군침으로 거인의 목젖이 올라갔다 내려가는 소리가 아주 깊은 곳에서 들렸다.
부채질하며 물었다.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야?"
저 밑에 다른 동굴 입구에서
한숨의 바람소리가 길고 천천히 들렸다.
"휴우~ 음 그보다 좀 더 기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어."
"내가 움직이면 무언가 망가지거나 무너지거나 한단 말이지."
"한 걸음, 손짓하나 이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야.
내가 움직이면 세상은 떨고 흩어지지"
천천히 부채질을 하며
"그래 넌 움직일 때마다 보상 고지서가 날아오잖아.
이 세상이 네겐 너무 약하고 작을 수 있어."
거인은
"쓸데없이 큰 몸이 세상과 나 사이에 있는 높은 벽이 아닐까?"
"밥을 그렇게 많이 먹으면서 벽이라고?"
부채로 입을 가리면서 작게 말했지만 듣지 말아야 할 그분이 듣고 말았다.
동굴이 좌우로 크게 흔들리고
저 위에서는 툭툭 뽑히는 소리가 들렸고
동굴 밖에는 노란 밧줄 같은 머리카락이 떨어졌다.
"맞아 밥도 많이 먹지. "
잠깐.
그리고 아주 낮게,
“그래서 더 겁나.
내가 먹는 것도, 내가 걷는 것도… 전부 세상을 건드리니까.”
그녀가 벌떡 일어나 한쪽 벽으로 가서 부채로 두들겼다.
"벽이라면 벽이기도 하고 누구에겐 보금자리이기도 하고."
흔들리든 말든 시끄럽든 말든
주위의 귀뚜라미들은 계속 자기들 소리만 내었다.
뒤늦게 반응하는 박쥐 한 마리가 또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계속 이어갔다.
"팡타, 너 이제 속옷만 입고 살아야겠다."
그녀의 눈에 장난기가 번지고 있었고 나를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포장지 틈으로, 지혜가 얇게 새고 있었다.
상황을 이해하기 힘든 거인은
"또 장난이냐? 너는. 날 슬프게 하는구나. 울어버릴지도 몰라."
울어버린다는 말에 우신은 잽싸게 확성기를 집어 들어
"울기만 해 봐 내가 확성기를 틀어 버릴 거니까.
더 깊은 동굴로 들어가 네 고막 옆에서 평생 소리를 내버릴 거야"
울리는 목소리로
"아냐 아냐 모리아. 말이 그렇다는 거야."
그녀는 동굴을 둘러보며
"넌 벽이 아니고 살이야. 아주 아주 거대한 살"
"내 말대로 겉옷을 벗고 맨몸으로 풀밭에 누워야 돼.
풀밭에서 꼬박 3일 밤낮을 지내고
한 달 동안 햇빛, 달빛 그리고 날씨를 잘 관찰하고 기록해야 하고.
그러고 나서 뭐가 바뀌었는지 나한테 편지 보내줘. 알았지?"
조용하게 귀뚜라미만 울었다.
그녀는 확성기를 들고 단호하게 확인했다.
"알았냐고???"
거인의 손가락이 동굴에 들어왔다가 나갔고
마지못해 대답했다.
"어 어 알았어. 알았다고."
거인은 그녀를 다시 우신당에 곱게 내려다 주고
그녀의 신신당부대로 조심히 발걸음을 옮겨 되돌아갔다.
두 달 후쯤 팡타그뤼엘로부터 귀여운 편지가 왔다.
[편지]
'완벽하지 않은 어리석음은 지혜로 채운 모리아에게
당신의 말대로 맨몸으로 풀밭에 누웠을 때
내 몸 전체가 이 세상과 딱 맞닿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세상은 날 간지럼 폈고,
날 안아 줬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햇빛, 달빛, 비,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했습니다.
그러자 작은 벌레들과 씨앗들이 내 몸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다음은 좀 더 큰 생명들도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나를 피해 다니던 세상이 이제는 나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내 몸이 세상이고
세상이 내 몸 같습니다.
나의 커다란 몸은 세상과 넓게 겹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리아
-팡타그뤼엘로부터'
– 메를로-퐁티의 ‘살(flesh)’
메를로 퐁티의 '살(flesh)'은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연결장치' 라기보다,
애초에 둘을 완전히 떼어놓을 수 없게 만드는 공동의 매질에 가깝다.
그는 주체와 객체를 딱 잘라 나눈 뒤 연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서로 뒤집힐 수 있는 얽힘을 말하려 한다.
그래서 팡타그뤼엘이 자기 몸을 '벽'이라고 느끼는 건 이해된다.
벽은 닿는 순간, 관계가 아니라 단절의 판정이 되니까.
하지만 '살'은 닿음을 끝내지 않는다.
닿음이 곧바로 세계가 몸 안으로 들어오고, 몸이 세계 쪽으로 열리는 사건이 된다.
그러니까 우신의 처방이 풀밭인 건, 철학 강의가 아니라 실험이다.
"너는 벽이 아니라 살이야."
"세상이 네게 붙을 수 있는 방식으로, 네가 먼저 닿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