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경험과 기준에 의한 구분.
책, 영화, 드라마. 많이 본 순대로 나열해봤다. 세 가지 매체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책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정확히는 좋아하다 보다 익숙하다가 더 적합하지만. 부모님은 드라마를 보면서 가끔 눈물을 훔쳤지만 좋아한다고 말씀하신 적은 없다. 당연히 보아야 한다고 권하신 적도. 하지만 책은 그랬다. 사방면이 책으로 가득 들어차 있는 자그마한 방을 좋아하셨고, 동생과 나를 앉혀놓고 매주 독서토론을 했다. 집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어쩌다 짧은 독후감이라도 써가면, 밀린 칭찬을 몰아서 내어주셨다. 책은 내게 호감으로 다가오기 전에 필수적인 것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그 과정이 억지스러웠던 것도, 납득 불가한 것도 아닌 데다 꽤 잘 맞아서 작년까지는 유용한-거의 유일한- 취미였다.
많은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나 또한 독서를 취미로 삼는 행위는 매우 고상한 일이라 생각했다. 지하철에서 남들이 스마트폰을 볼 동안-그들이 휴대폰으로 책을 보든 말든, 그건 상관없었다.- 책을 읽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기도 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랬다. 전혀 관심도 없던 선배의 집에 다 같이 놀러 갔다가 침대 머리맡에 <호밀밭의 파수꾼>이 있는 것을 보고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으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야자 시간에 몰래 <무정>을 읽다가 선생님께 빼앗기고는 학교 공부나 하라는 타박을 들었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선생님이 겉으로는 그래도 속으로는 나를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책 읽는 아이를 싫어하는 어른은 없다고 믿었으니까. 책은 언제나 고귀하고, 올바른 취미였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는 선생님의 말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학부를 졸업하기까지 목적 없는 독서를 해본 적이 없다. 문학도였는데도 수업에서 배우는 작품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인턴을 마치고 잠깐 시간이 붕 떴을 때, 내가 무얼 놓치고 있나 되짚어봤다. 아마 대기업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난 뒤였던 것 같다. 그것만 보고 달려왔는데 떠나보내버렸다. 혼란스러웠다.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당장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지금까지 뭘 해왔는지도.
타스케와 박웅현의 영향을 받아 나의 틀을 깰 수 있는 책들을 잡히는 대로 읽었다. 내가 너무 남들의 기준, 특히 부모님의 틀에 갇혀 살아왔던 건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똑바로 말하자면 틀을 만드는 일이었다. 깨질 틀 조차 없었으니까. 일주일에 두 권씩, 1년에 100권 정도 읽었나. 고전이나 유명한 책들만 읽었으니 대부분 좋은 책 들이었고, 100권가량을 채웠을 때는 이전과 많이 달라져있었다. 사고하는 방식이나, 관점의 방향, 내리는 결론까지. 책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실수한 것이 있다면 그 100권 중에 소설을 포함한 문학은 10%도 안 된다는 것이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어 단어와 영어 회화 스크립트를 달달 외우고 있던 내게, 당장 무용한 책을 읽으라는 건 너무 가혹하다.
소설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 것은 정확히는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노르웨이의 숲>이었던가 <해변의 카프카>였던가. 어쨌든 하루키를 읽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누구의 추천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읽어보라고 권하던 작가였다. 일부는 "한국 사람들은 하루키에 너무 환장해." 했는데 나는 그 환장하는 이들 중 한 명이 되기로 했다. 에리히 프롬의 분석적이지만 따뜻한 말투가 좋았는데, 하루키는 그 말투를 소설에서 재현해낸 것만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소설은 항상 은유적이고, 불친절하고, 직관적이지 않았는데. 하루키는 달랐다. 뭘 생각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투명한 글이었다.
그렇게 이상에서 실제에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에리히 프롬이 '우리는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하루키는 그것을 '이렇게 하면 된다'하고 적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소설은 비문학보다 실제에 가까웠다. 당위보다는 일어나는 일에 대한 묘사에 가까웠으니까. 내게는 집단으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으로서의 개인, 즉 사적인 개인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물론 이것도 부족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지만. 이 얘기는 영화 편에서 이어가자.
영화를 좋아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주말만 되면 영화를 보러 가겠다고 난리를 쳤지만, "난 그 돈으로 옷 한 벌 더 살래." 하던 애였으니까. 그때 영화 티켓 한 장이 5,000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고작 2시간에 그 돈을 쓰는 게 얼마나 아깝던지. 촌스러운 티 쪼가리는 척척 사면서 영화에는 유난히 박했다. 돈도 돈이지만 무역 회사의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을 꿈꾸던 나와 예술은 거리가 멀었고, 내 여가시간을 채우는 취미는 따로 있었다. 영화가 비집고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독립 영화에 배우로 출연한 적이 있다. 세 번 정도.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영화는 물론이고 각본을 쓴 감독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냥 내가 치는 대사가 뭔지, 화면에서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만 중요했다. 내 모습을 남기고 싶었고, 그게 영상이면 좋겠다는 단순하고 이기적인 생각으로 참여했으니까. 작업의 성패와는 별개로 거기서 만난 M과는 인연이 닿아 그 후로도 종종 만났다. 그녀는 "영화 하는 애들은 입학 전에 기본적으로 1,000편은 보고 들어와요. 진짜 좋아하는 애들만 오니까."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1,000편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 감도 안 왔지만, 영화라는 분야는 그만큼 열정적인 사람들이 선택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고 보니 시나리오 스터디를 한 적도 있다. 글 잘 쓰고 싶은 욕심에 찾던 것이어서 딱히 시나리오일 필요는 없었는데, 스펙업에 올라와 있던 게 그것밖에 없었다. 모인 사람은 나, 방송 작가를 꿈꾸는 사람, 한예종 입시를 준비하는 친구 둘. 넷이서 매주 강남 스터디룸에서 만나 글을 쓰고 서로에게 피드백을 줬다. 친구 둘 중 하나인 H의 글을 좋아했다. 그땐 서로 말을 아꼈지만, 우리 중에서 제일 잘 썼으니까. 그는 당시 26살이었는데, 한예종 입시를 준비했다. 늦은 나이에도 도전할 만큼 영화라는 분야가 매력적인가 생각했다. M과 다른 여러 팀원들을 떠올리면서. 스터디는 얼마 안 가 모두의 생업을 핑계로 파투 났고, H는 한예종에 합격했다. 그도 1,000편을 봤을까 생각했다.
영화를 열심히 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마 그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이 그랬던 것처럼, 내게 영화는 즐기는 것보다는 간편하게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는 수단-공부- 정도로 생각되었다. 그들의 섹시한 취향이나 우아한 말투, 깊숙한 표현들이 좋았다. 1,000편을 보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단순한 동경과 호기심으로 작년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 편씩 한 달 정도를 봤는데, 그때까지도 영화는 오락보다는 공부에 가까워서 조금 힘에 부쳤던 것 같다. 정확히는 공부하려고 보는 건데, 책만큼 남는 게 많지 않다는 생각에 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압박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도 드문드문 꾸준히 봐서 70편 정도 본 것 같다.
언젠가부터는 영화에 대한 취향을 말할 수 있게 됐다. 친구 B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보다는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이 취향을 드러내는 데에 더 적절하다고 했는데, 나는 미셸 공드리를 싫어한다. 내 주변인들이 그렇게도 추천하던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치즈의 <무드 인디고>를 좋아해서 보고, 샬롯 갱스부르를 좋아해서 <수면의 과학>을 봐도, 그들에 대한 호감도 가산점이 되지 않을 만큼 별 감동이 없었다.
책은 영화보다 훨씬 오랜 기간, 많은 작품을 접했지만 사실 아직 누굴 좋아하고 싫어한다고 말하기가 모호하다. 그런 것을 보면 내게 영화가 꽤 잘 맞는 매체였나 싶기도 하다. 짧은 기간 내에 내가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으니까. 확실히 소설보다 훨씬 직관적이다. 책에서는 "그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려고 책상 위에 있는 카드를 몰래 집어 재킷의 안주머니에 넣었다."라는 문장을 영화에서는 단 몇 초 만에 보여줄 수 있다. 혹자는 그렇기 때문에 상상력이 제한된다고도 하지만, 확실히 피로도가 덜해서 좋다. 개인으로서의 개인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수단이라는 건 이런 의미에서였다. 직관적인 전달. 이상과 실제의 거리가 가까운 매체.
책은 좋아했고, 영화는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면 드라마는 싫어한다에 가까웠다. 책이 취미라고는 했지만 게임이나 만화처럼 정신 팔려 좋아하는 종류는 아니었고, 맘 편하게 하는 딴짓에 가까웠다. 해야 하는 일 안 해도, 죄책감이 덜 드는 취미. 종종 영혼의 식사라는 말로 비유되듯이, 책은 그 장르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양분이 된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반면 드라마는 정반대였다. 보고 나면 남는 것은 하나도 없고, 다루는 이야기의 수준은 천박하며, 심지어 그 양은 방대해서(영화는 한 번 보면 끝이지만 드라마는 몇 회차가 있고, 심지어 시즌까지 있으니까.) 엄청난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건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지금까지 미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드라마를 킬링 타임용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에 했던 RPG 게임처럼. 그러다 처음으로 능동적으로 시간을 낭비해보자(?)고 용기를 내어 실리콘밸리 시즌 1을 켰다. 한 달 만에 시즌 3을 전부 다 보고, 넷플릭스를 결제했다. 지금은 슈츠를 보고 있고, 일주일에 시즌 하나씩 매우 열심히 보고 있다.
휴대폰에 왓챠 플레이를 깐 건 사실 얼마 안 됐다. 그전에 영화를 볼 때는 대부분 노트북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왜냐고? 난 영화도 공부하듯이 했으니까. 화면의 반은 영화를, 나머지 반은 에버노트를 켜놓고 일시정지를 해가며 좋은 장면을 기록했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왓챠 플레이를 받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기록할 여력이 없으니까, 그냥 보면 되니까. 시즌 하나를 보는 것도 벅찬데 그걸 어떻게 영화 보듯이 정리할 수가 있겠냐고. 한 번 그렇게 시즌을 깨고 나니, 드라마도 볼 수 있겠다 싶더라. 어쨌든 그렇게 드라마라는 매체에 입성했고, 슈츠를 보면서 홀딱 빠졌다.
앞에서 말했듯 책과 영화의 차이는 직관성이다. 우리는 활자로 삶을 살지 않는다. 활자는 우리의 삶을 묘사하거나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그런 묘사와 해석에서 나오는 고차원적인 이야기 덕에 책을 좋아한다.)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를 말해보라면 빙의의 정도다. 영화는 길어봐야 두 시간이 조금 넘는 분량이지만, 드라마는 한 편에 짧게 잡아 30분이라 쳐도 한 시즌이면 5시간 정도 된다. 당연히 두 시간 동안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의 면모와 다섯 시간 동안 보여줄 수 있는 그것의 양과 질의 차이는 확연하게 차이 난다. (그런 짧은 분량 덕에 가질 수 있는 낭만과 간편함 역시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영화만 볼 때는 인물보다는 그 인물이 하는 말에만 신경 썼다. 명대사, 명장면... 단편적인 것들에 집착했다. (그래서 캡처하고 타이핑했지.) 그러다 보니 인물이 한 표현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해보게 되는데, 정작 인물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 못했다. 책의 한 문장을 읽듯 영화를 본 것이다. 캡처와 타이핑을 그만둔 후부터는, 그리고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후부터는 대사보다 인물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한 말을 한마디 한 마디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무슨 결정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대사나 장면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그 인물이 좋아지기 시작하더라. 이제 작품의 후기를 말할 때 '어떤 장면이 좋았어'가 아니라, '루이스 정말 좋아'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직관적이라면, 드라마는 직관적인 동시에 친절하다. 그대로 보여주면서 요리조리 다양한 각도로 자세하게 알려준다.
내용은 별거 없는데 관련된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다 보니 글이 길어졌다.
결론은, 각 매체에 비하여
책은 좀 더 고차원적인 이야기(고급이 아니다. 사례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연역적 방법이라는 뜻)를 얻고 싶을 때 읽고, 영화는 짧은 시간 내에 간편하게 사람 사는 이야기를 습득하고 싶을 때 보고, 드라마는 좋은 작품임이 증명된 것 위주로 등장인물의 삶을 그대로 느끼고 싶을 때 본다.
당분간은 책도 안 읽고 드라마만 볼 거임. 뀨뀨
그래서 요즘 제가 보는 게 뭐냐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