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TIL 무인양품 디자이너 하라 켄야, <디자인의 디자인>
몇 주 전, 친구와 길을 지나가다 본 한 카페 앞에 멈춰섰다. 나는 출입문에 붙어있는 안내문을 보자마자 놀란 표정으로 “와!”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이란 이 안내문과 같은 것이다.
의아할 수도 있다. 예쁜 종이를 쓴 것도 아니고, 특이한 폰트를 쓴 것도 아닌데다 하다 못해 카페 로고가 박혀있지도 않은, 투박한 A4용지에 글자 몇 자 덜렁 타이핑해서 붙여 놓은 것 뿐인데. 좋은 디자인이라니?
디자인, 디자인, 디자인.
많이 들어보기도 하고 내 입에서 나올 때도 있고. 여하간 엄청나게 흔히 보이고 자주 쓰이는 단어. 흔히 “이거 디자인 좀 해 줘!”해서 들여다보면 시각적으로 ‘예쁘게’ 만들어 달라는 요청일 때가 많다. 물론 그런 장식 역시 디자인의 한 부분이긴 하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디자인의 범위를 너무 좁게 설정한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을 가장 잘 드러내는 표현은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다. 디자인이란 전달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의도를 수신자가 이해하기 쉽게 그들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것을 뜻한다.
즉, 디자인의 본질은 데코레이션이 아니라 커뮤케이션이다.
그런 관점에서 카페의 안내문은 비록 예쁘지는 않지만, 좋은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매장 음료, 음식은 수거해드립니다.” 이처럼 정중하고 세련된 '외부음식반입불가' 안내가 또 있을까!
무인양품 디자이너 하라 켄야는 그의 저서 <디자인의 디자인>에서 디자인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요구한다. 디자인이란 무엇인지, 디자이너는 어떤 임무를 가지고 있는지, 앞으로 디자인의 방향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등등.
How to를 다루는 디테일한 부분도 있지만, 이번 글에서는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해보았다. (중간중간에 그, 혹은 동료 디자이너의 천재적인 디자인 사례도 있으니 흥미로운 글이 될 것이다.)
예술(아트)과 디자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인문대를 다녔던 나는 상경대나 사회대 같은 문과 전공이 아닌 타 전공에 대해서 잘 몰랐고, 다른 학과 친구들과 교류가 있는 자리에서 누군가 “나는 동양화고, 얘는 디자인이야.” “야, 아니거든. 나 서양화야.” 라며 둘이서 투닥거리면 머릿속으로 ‘응 미대~’하고 그 둘을 같은 카테고리에 넣어버렸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예술가보단 디자이너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저자는 개념의 차이를 한 마디로 간단하게 서술한다.
*단, 그는 예술과 디자인을 구별하는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예술은 개인이 사회를 마주 보는
개인적인 의사 표명으로
발생의 근원이 매우 사적인 데 있다.
'예술가란 자기를 표현하는 사람이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들은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한다. 그래서 그 작품의 근원은 오직 예술가 자신만이 알 수 있다. 우리가 순수예술 작가들의 세계를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의 목적은 우리를 이해시키는 것에 있지 않다.
물론 그들의 표현을 해석하는 방법은 많다. 그러나 그 표현들을 재미있게 해석한 후 감상하고 평가하여 전시회 등으로 재구성하는 등의 방법으로 활용하는 것은, 예술가의 영역이 아니라 제삼자가 작품을 접하는 방식이다.
나는 예술의 힘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며 '알아보지도 못할 걸 왜 만들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그들의 작품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영감을 일으키고, 그게 또 다른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예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회화 뿐만 아니라, 관념적인 얘기들, 심지어 개인적인 일기 등 실용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작업들 대부분이 궤를 같이 한다.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그 동기가
개인의 자기 표출 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쪽에 있다.
서론에서 밝혔던 ‘다리놓는 행위’와 연결해서 이해하면 된다. 디자인은 본질적으로 메시지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목적 자체가 본인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의 전달에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그 계획이나 과정, 결과물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디자인은 예술과는 달리 평가가 가능한 영역이다. ‘메시지를 잘 전했다.’라는 명확한 기준으로 좋은 디자인과 나쁜 디자인을 구별할 수 있다. 서론에서 밝힌 카페 안내문이 좋은 디자인인 이유는, 내가 그 안내문을 보고 갖고 오지도 않은 외부 음식을 밖에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안내문을 통해 이끌어내고자 한 반응을 정확하게 얻어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디자인의 본질은 커뮤케이션이다.
디자인에 대해서 따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디자인을 미적 행위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기가 쉽다. (내가 회화과 학생과 디자인과 학생을 ‘미술하는 사람들’로 퉁쳐버렸듯이.)
저자는 ‘디자이너는 상황으로부터 단절되어 패키지화된 디자인을 공급하는 직능이 아니다.’라고 표현한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의도와 목적의 핵심을 파악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예쁘게 포장하는 것에만 신경쓰는 것은 완전한 디자이너가 아니다. 다시 말해, '기획은 기획자가,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식의 디자인은 반쪽짜리 디자인이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관점으로서의 디자인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에 어울리는 정보의 형태를 적절한 곳에 소구하는 것까지 고민하는 전 과정을 뜻한다.
저자 하라 켄야는 우메다에 있는 한 산부인과/소아과 전문 병원의 사인(sign) 디자인을 맡게 된다. 그는 사인을 통해 두 가지 메시지를 전달했다.
첫 번째 메시지는 ‘편안함’이다. 그는 사인의 소재를 ‘천’으로 기획했다. (병원에 천으로 만들어진 사인이라니, 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다.) 그는 보통의 병원이라면 환자들에게 신뢰를 형성하기 위해 딱딱하며 직선적인 사인이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병원은 임산부가 출산 전후 드나드는 곳으로, 그들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부드러운 요소가 가미되어도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두 번째 메시지는 ‘청결’이다. 천이라는 소재도 신선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천의 색을 흰색으로 지정했다는 점이다. 소아과를 겸하고 있으니 아이들이 수시로 오갈테고, 초콜릿 묻은 손으로 천을 만지기도 할텐데. 그런 관리상의 문제는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이 질문에 그는 그게 바로 핵심이라고 말한다. 더러워질 것을 뻔히 알지만 일부러 천을 사용했다. ‘더러워지기 쉬운 것을 항상 청결하게 유지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이다.
‘흰색 천 사인’이란 이러한 치밀한 기획에 기반한 기발한 발상이다. 그는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파악하여, 적절한 소재로 구현한 뒤 병원 전체를 디자인했다.
만약 저자가 기획에 참여하지 않고 다 된 기획을 잘 꾸미는 역할만 맡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흰색 천은 물론이요, 천이라는 소재 자체가 사용되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는 사인의 폰트는 어떤 걸 쓸지, 배치는 어디다 할지, 판의 모양을 둥글게 할지 각지게 할지 등을 생각해야 했겠지.
그렇다면 디자이너는 앞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야 할까?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욕망의 에듀케이션’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문자 그대로 욕망을 교육한다는 의미다.
*단, 저자는 교육이라는 단어가 가진 계몽적인 느낌이 싫어서 에듀케이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보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뭔가를 이끌어낸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좋을 것 같다.
감각이 뒤떨어지는 곳에서는 마케팅만 어떻게 잘 하면 질이 낮은 상품도 잘 팔린다. 그러다 보면 기본값은 결국 질 낮은 상품이 될 것이고, 계속해서 만들어질 것이다. 좋은 디자인을 해도, 어차피 알아보지 못할 테니. 좋은 디자인이 나오기 위해서 필요한 건 능력 있는 디자이너 뿐만이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수준 역시 중요하다.
이를테면 이 책의 다른 장에서 소개하는 디자이너 반 시게루의 네모곽 화장지를 보자.
가운데에 들어간 심이 사각형인 이 화장지는, 휴지걸이에 걸어 잡아당기면 달가닥달가닥하는 마찰음을 낸다. 일반 휴지는 쓱 잡아당기면 주르륵 풀리지만, 그것은 필요이상으로 휴지를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부러 불필요한 소리를 삽입함으로써 ‘자원을 절약하자.’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마치 휴지가 ‘절약해줘~~!!!!’하고 비명을 지르는 듯하다.)
하지만 나부터도 처음에 사각형 모양의 휴지를 봤을 때 ‘어, 신기하네?’ 정도의 반응을 보였을 뿐, 이게 자원절약을 외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리 의도가 잘 드러난 좋은 디자인이라도, 수신자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해당 디자인은 조금씩 관심을 받지 못하고 소리없이 사라질 것이다. 나처럼 그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설명을 듣고도 이 디자인에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면 휴지를 구매하지 않을테니까.
저자는 좋은 디자인이 많이 나오는 세상을 위해, 디자이너가 시장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이런 것도 멋지지 않나요?' , '이런 미래를 만드는 건 어떤가요?'라고 제안해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수신자로서의 우리도 중요하지만, 전달자로서의 우리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가 타인과 소통하는 한, 모두가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점주는 매장 관리를 엄청나게 신경 쓰는 분이었는데, 첫 날 카운터 곳곳에 빽빽이 붙어 있는 포스트잇들을 보고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할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안에 적힌 말들 때문에.
점주 입장에서는 알바가 돈을 받고 일하니 하나라도 더 해줬으면 하고, 알바 입장에서는 시키는 일이 너무 많으니 몇 개를 빼먹기도 했었나보다. 포스트잇은 온통 이번만 ‘용서해줍니다’, 이 정도만 ‘봐드립니다’, 왜 안하시냐. 자꾸 그러면 ‘누군지 잡아냅니다’ 등의 자극적인 말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가 전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주어진 일에 신경 써달라는 것이었을텐데, 일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데에 대한 섭섭함, 분노 혹은 점주로서의 권위 등의 불필요한 요소들이 덕지덕지 붙어서 메시지의 핵심을 흐리고 말았다. 색깔 예쁜 포스트잇에 정갈한 글씨로 '보기 좋게' 붙여놓긴 했지만, 전하고 싶은 말에서 꼭 필요한 것 외의 것들을 덜어내는 작업을 하지 않은 것이다.
수신자의 입장에선 당연히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 나는 그가 디자이너였다면, 좀 더 자신의 메시지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다른 문장을 선택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디자인은 과제나 프로젝트같은 특정 상황에서만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편의점 점주라는 직업은 디자인과 전혀 연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넓은 의미, 즉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디자인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디자인이 필요하고, 그를 위해 우리 모두는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
(고는 했지만 저는 디자인 전공자도 아니고, 따로 배워본 적도 없습니다... 그냥 독후감 정도로 생각해주셨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