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군가의마음 May 03. 2020

라포

나의 원동력

라포(Rapport)

두 사람 간의 관계에 있어 상호 신뢰나 친밀도를 나타내는 말이다.

간호학과를 가기 전에는 이 단어에 그다지 친숙하진 않았었기 때문에 흔히 쓰이는 단어는 아니었는데 간호학을 공부하면 할 때마다 라포에 대한 얘기가 꾸준히 나왔고 졸지에는 귀에 박혀버린 그런 단어였다.

실습 때는 이 라포의 개념이 더욱 중요해지는데 이 시기에는 라포가 어떻게 하면 모르는 상대에게 친근히 다가가서 대화를 많이 나누느냐 이런 개념으로 라포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임상경험 어언 사 년, 라포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간호사가 종종 간호사들끼리 대화할 때 '이 환자 내 환자다.'라고 말하는 것은 보통 이 라포에 기반한 경우다. 우리는 어싸인이 정해지는 그 순간 환자에게 어떤 종류의 애착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애착은 환자 스스로도 어느 정도 느끼게 되고 돌봄을 받는 입장에서 상대의 그런 감정을 좀 더 쉽고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역학이 그려지는 듯하다.

이러한 이유로 내 환자는 내 근무시간 혹은 그 이후로도 내가 위해야 할 어떤 대상이 된다.


하지만 모든 간호사가 이런 변태적인(?) 본능을 가지고 일하는 건 아니다. 언제까지나 환자는 환자인 채로 선을 긋고 일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나는 이 차이가 몰입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그 사람의 능력치를 떠나서 이미 간호사로서의 삶을 한 번 선택했던 사람은 이타적이지 않을 수 없다는 전제 하에, 그럼 얼마만큼 그 혹은 그녀가 간호사로서의 삶에 몰두해 있느냐. 그게 라포를 형성하는데 큰 변수가 된다.


중환자 간호를 하는 데 있어 라포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병동에 비해 중환자실은 환자와 의료진 간 의사소통이 활발한 장소도 아니고 대부분의 환자들은 의식이 없거나 의사소통을 하는데 제한이 있다. 어찌 보면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과하게 감정이입을 하는 게 에너지 낭비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일하는 것만으로도, 주위 눈치 보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는데 왜 내가 부가적으로 그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해주어야 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의 일은 이것 말고도 너무나 많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이미 벅차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라포 형성을 손에서 놓지 않는 건 결국 라포를 쌓아서 축적된 환자와의 소통 경험이 나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애착을 느껴 열과 성을 섞어 돌본 환자는 나에게 위로로 되돌려준다. 내가 받았던 그 위로들.


내가 화장실 한 번 못 가고 이리저리 뛰고 있을 때 그 기운 없는 손으로 슬쩍 불러 보호자가 갖고 온 음료수 하나를 주머니에 찔러 넣어준 할머니 환자.


짜증만 부리고 예민하시다고 인계가 넘어온 할아버지께서 부산스러운 내 손목을 턱- 잡고 고마워 무뚝뚝하게 한마디


수술 후에 통증을 안쓰럽게 내색도 안 하고 계셨던 할머니가 내가 오니 병원에 입원하고 처음으로 제일 편하다 립서비스해주시기도 한다.


장기환자로 섬망이 심해 간호사에게 욕을 하고 날 때리려고도 했던 한 환자분이 상태가 악화되어 모니터링 중이었다. 손이랑 발에 로션을 듬뿍 발라드리던 어떤 밤에 가족이 와도 아무 말하지 않던 사람이 알아듣기도 어려울 만큼 목소리가 다 갈라져서는 고맙습니다. 하기도 한다.


위로에는 직접적인 말이 없을 때도 있다.

그 라포 때문에, 한순간에 생기는 그 어떤 것 때문에 구태여 한 나의 행동에 나 혼자 잘했어, 잘했어. 하는 그런 경험들이 다 위로가 된다.


인공기도 삽관을 목전에 둔 환자에게 의식이 없어질 거라고 예고하고 서로 눈을 마주치고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그런 순간이라던가

인공기도삽관을 하고 중환자실로 온 환자에게 내 소개를 할 때의 눈 마주침이라던가


임종을 위해 부랴부랴 병동을 잡고 환자를 보내라는 전화만을 기다리던 때

고용량의 산소 주입에도 산소포화도가 80 선에서 깜빡이고 심박수가 170을 왔다 갔다 하는 그 힘든 상황에 버티라는 내 말에 그 무례한 요구에 또 알겠다며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런 순간들

우리 환자분은 나한테 손이 잡힌 채로 목전에 죽음을 앞두고 내 지시에는 또 열심히 따라준다.


애정. 우리의 라포는 근본적으로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이다.

언제 봤다고 애정이냐 하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리고 이 맛을 아는 사람은 그때부터 진짜 간호사가 된다.


우리는 가끔 무례하다.

내가 이거 하지 말랬는데 왜 했어하면서 반말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호통을 치거나 싸우기도 한다.

지나친 감정이입 때문에, 라포 때문에.

그래도 조금은 이해해주시길. 내 환자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비상구 계단에 가서 눈물 훔칠 사람들이니까.






작가의 이전글 어레스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