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철없단 말, 당신이 처음이야
제가 낭만이 가득한 사람인 줄, 모든 것이 땅바닥으로 훅 꺼졌을 때서야 알았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인 줄만 알았던 저란 사람은 알고 보니 낭만이 많은 철없는 사람이더군요.
모험의 계기는 대학교 4학년 때 찾아왔습니다. 최고의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현실과 타협한 ‘차선의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스스로가 와장창 깨졌을 무렵, 사주를 봤습니다. 그럴 땐 사주가 어찌나 매력적이던지요. 노상의 할아버지는 고민을 털어놓은 저에게 생각지도 않던 진로를 추천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잘 맞을 거라고요. 뒤에 덧붙이신 그 적성의 이유도 퍽 신선했습니다. 철이 없어서 누구보다 학생들을 이해하고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더군요. 그런데, 뭘 하던 하나만 좀 진득-하게 해 보라고. 그러면 뭐든 될 거라고 했어요.
이럴 수가. 다시금 말하자면, 그때의 전 나름 진득-하게 잡고 있던 진로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방황할 때였습니다. 쌓여온 실망과 권태감에 열정의 불이 꺼져버렸거든요. 캄캄한 길에 홀로 버려진 것 같았죠. 저는 또 다른 무언갈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들어본 철없단 말에 다시금 마음이 일렁였습니다. 유감이에요, 할아버지. 와중에 철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네요.
이렇게 말하니 유별나게 당찬 사람 같지만, 극적인 순간은 (그것이 포기일지라도) 오랜 어두운 나날을 거쳐 테러와 같이 찾아옵니다. 저는 성적이 꽤 좋아서 공부가 적성인 줄 알았어요. 숙제도 꼬박꼬박 하고 노는 모범생이었거든요. 부모님은 그런 저를 보며 적극적으로 학업을 도와주셨습니다. 사실 공부보다 소설과 그림이 더 좋았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소설을 읽으면 안 된다고 했고, 그림 그리는 시간도 사라졌어요. 학원이 늘고 쉬는 시간과 이동시간조차 주어진 숙제를 하는데 써야 했어요. 하루의 공부시간을 재는 스톱워치의 숫자만 치솟았죠. 그렇게 10대를 스톱워치 속에 온전히 담아 보냈고, 성인이 됐지요.
‘이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야지!’ 했는데, 엉덩이를 붙이고 인내하며 살았던 그 10대의 몸과 정신이 성인이 된 나를 붙잡았습니다. 제일 열심히 기를 쓰고 열정을 불태울 힘을 그때 다 소진한 것 같았어요. 무언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았죠. 인생은 편수가 나뉘어 있는 만화나 소설 같지 않았어요. 연속된 시간 속에서 좀 전의 나로 느껴질 뿐이죠.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선택과 행적이 지금의 나를 붙잡았어요.
세상이 그런 저를 배려해주겠나요? 그대로 거친 세상에 내동댕이치더니 스스로 길을 찾으라지 뭐예요. 모든 어른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요. 그런 제가 성실함을 유지할 대상으로 택한 것은 제 ‘대학 전공’이었어요. 새끼 오리가 처음 본 것을 어미로 여기는 것 마냥 저는 제가 공부할 학문을 운명이라 생각하기로 했어요. ‘어렸을 때 책 좀 많이 읽어둘걸. 더 어렸을 때 그림 배우고 싶다고 밀어붙여 볼걸. 더 더 어렸을 때 공부 말고 친구들과 놀아도 볼걸.’ 그렇게 생각만 하다 10대 때 잡힌 훌륭한 관성으로 ‘모범적인 대학생활‘을 했어요.
그런데 웬 일? 어엿한 사회인이 될 준비를 해야 할 무렵, 철없는 ‘내면의 나’가 돌연 듯 “이제는 한계야!” 하고 테러를 일으키더니 몸뚱이를 파업시켜버리지 뭐예요? 몇 년간 성실로 돌아가고 있던 생활이 무너지고 축 늘어져 있는 생활만 이어졌죠. 감정만이 끊임없이 일을 했어요. 우울했고, 불안했어요. 그때, 소중한 인연이 저에게 제안 하나를 했습니다. 자기가 다니고 있는 화실이라도 함께 다니자고요. ‘그림? 아, 그림이 있었지.’ 친구만 보고 오케이, 했죠. 그 얼결의 시작이 1년을 넘어 이윽고 내 삶의 일부가 되었어요. 그 시작은 ‘철없는 나‘의 마음에 들어 낭만이 되었거든요.
분명 쉽지 만은 않았어요. 얼결에 가게 된 화실 첫날의 긴장감이 아직도 생생하거든요. 함께 한다던 친구는 첫 수업에 지각을 해버려서 홀로 화실의 문을 넘어야 했고요, 공부하며 줄 긋는 용도에 익숙해져 있던 연필은 뻣뻣해진 제 손 안에서 비틀거렸어요. 모범생이니까, 선생님이 그려보라는 걸 꿋꿋하게 끝까지 그려내긴 했어요. 모범생인 것이 그런 면에서 도움이 될 줄이야! 힘이 들어갔던 어깨와 허리가 근육통을 호소하고 있는 것을 집에 돌아와서야 알았죠. 그 문지방을 넘은 시작은 지금까지도 오랫동안 살아남았습니다.
도전이란 열정적인 단어를 붙이기엔 저의 시작은 문지방을 넘는 것뿐이었어요. 아무리 봐도 멋진 전사가 투쟁하여 알을 깨는, 그런 도전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내 마음에 드는 낭만적인 알 속을 만드는, 그런 시작이었어요. 과거의 저는 어느새 익숙해진 침대에서 기름진 감자칩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 저에게 “나랑 같이 나가자!”하는 따뜻한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었고, 처음 들어본 철없단 말이 괜스레 마음을 울리고. 그렇게 못 이긴 듯 발을 내디뎠을 뿐이죠.
원하는 것을 찾아 떠나는 모험의 시작은 알을 깨부숴야 하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낭만이 가득한 철없는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기도 하죠. 단지 발을 내딛고, 그 관성으로 계속 걸으면 되는 거예요. 모험은 조용히, 당신도 모르게 시작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