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좋아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책을 못 읽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보자면, 시간이 없어서 못 읽는다는 핑계를 대며 안 읽은 것이었다. 어쩌다 책과 멀어졌을까, 생각해봤다.
그때였다. 내 상상 속에서 의사 가운을 입은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나는 아무래도 그에게 이름을 붙여줘야 할 것 같았지만, 이름은 차차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그는 사바나에 살고 있는 닥터이다.
“음…. 저는 원래 책을 좋아했거든요.”
“그럼, 책을 바라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그의 질문에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한 후 대답을 했다.
“책장이 무거울 것 같다, 그리고….”
사바나의 닥터는 내 대답을 끝까지 다 들을 의향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책장을 넘겼는데 괜히 재미없는 이야기가 툭 튀어나올까 봐 무섭고요.”
“아하, 그러시군요. 또 다른 생각은 안 드나요?”
사바나의 닥터가 무엇을 전공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진찰을 받는 환자로서 눈물을 글썽이며 반드시 질문을 해야만 했다.
“선생님, 책은.. 언제 보는 거죠? 시간이 많을 때 봐야 할 것 같은데, 저.. 책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음, 제 소견으로는….”
환자의 상태를 다 들었으니 사바나의 닥터는 진단을 내려야 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린 채로 꽤 오랜 시간을 보냈고, 노출된 미디어로 인한 뇌의 피로도가 상당히 높아 글자들이 눈에 잘 안 들어올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흑흑, 네 맞아요 선생님. 시간적 여유가 생겼는데도 책에게는 아직도 마음을 내줄 수가 없어요.”
사바나의 닥터는 내 상태를 꿰뚫고 있었다. 아니, 뭐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는 나의 말에 매우 단호하지만 아주 차분하게 처방을 내렸다.
“그럴 수밖에요. 책 알레르기로 오해할 수 있는 이 증상은 ‘사고의 습관’으로 인해 유발된 것입니다. 지금처럼 미디어 정보를 잘 선별하시면서 정해진 시간대 외에는 가급적 미디어 금식을 해주세요. 귀하가 가지고 있는 책들은 분명 얕은 지식들이 편재되어 있는 뇌에 깊이를 더해줄 겁니다. 운동하는 습관을 만드는 것처럼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근육이 붙을 시간을 주세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고의 습관이라. 사바나의 닥터는 처방을 내린 후 나왔던 곳으로 다시 유유히 들어갔다.
‘시간이 생기면 읽자.’
‘이 일만 끝나면 읽자.’
‘나는 좀 쉬어야 하니까.’
‘재밌는 걸 보면서 쉬고 싶어.’
‘책이 무거워서 못 들고나가겠어.’
나의 생각들을 훑어봤다. 그런데 이러다가는 평생 책을 못 보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내게는 습관 만들기 과정이 필요했다. 어느새 멀어졌으니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