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점심식사

by 생각많은얼룩말


톡톡. 주디가 화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앨리스, 괜찮아? 설마 세면대를 처음 써보는 건 아닐 테고."

"어, 주디! 난 괜찮아, 이제 나가!"


주디가 화장실 문 앞까지 오지 않았다면 앨리스는 한참을 더 멍 때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앨리스는 대답을 마치자마자 물 묻은 손을 서둘로 수건에 닦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주디는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나 했네. 별일 없으면 됐어. 자, 이제 이쪽으로."


주디가 화장실까지 앨리스를 찾으러 온 것이 정말 앨리스가 화장실에 오래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주디의 성격이 급해서 조금도 참을 수 없었던 탓인지 앨리스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부엌을 향해 앞장서 가는 주디 뒤에서 앨리스는 이렇게 물었다.


"주디, 내가 화장실에서 안 나오니까 걱정됐어?"

"걱정은 무슨.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그렇지!"


그렇다고 주디의 대답에 앨리스의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앨리스가 정말 화장실에 오래 있었던 건지, 주디의 성격이 급한 건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주디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자면, 둘 다 맞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순간 앨리스는 주디에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런 거구나. 그런데 주디,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뭔데?"

"음…,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아까 길에서 나를 처음 봤을 때, 그때도 내 머리색이 이랬어?"


앨리스는 머리카락 끝부분을 잡고 들어 올려봤지만 머리 색은 여전히 거울로 봤던 그대로였다. 앨리스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주디는 뒤로 돌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연하지, 그런 이상한 질문이 어딨어! 대체 어떤 미용실에 간 거야? 요즘 새로운 유행이야? 아니면…, 노랑머리만 하기엔 지루했어?"


앨리스가 자신의 머리색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으면 오히려 섭섭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밤새도록 들을 뻔했는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앨리스의 눈이 이상한 건 아니었다. 주디 눈에 앨리스의 머리카락 아랫부분은 갈색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음…, 미용실에 가본 지 오래고, 이건 새로운 유행도 아니야. 그런데 나도…, 잘 모르겠어."

"음…. 이상해. 그거 알아? 너랑 대화하면 뭔가가…, 이상하다고."


팔짱을 낀 채로 앨리스의 머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주디는 이런 이상한 대화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주디의 눈은 가야 할 길을 금세 되찾았고, 앨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부엌으로 향하는 주디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부엌은 예상치 못하게 엉망진창이었다. 식탁 위에는 흰 가루들이 여기저기 흩날려 있었고, 당근 조각(아니 파편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이 오늘 점심 메뉴가 무엇인지 짐작하게 했다. 거기다가 곧 재채기가 나오게 만들 만큼 코를 간질거리게 하는 계핏가루의 향까지. 본인은 모르겠지만, 이 까칠한 토끼는 앨리스의 상상 이상인 것만은 확실했다.



"우와, 당근 케이크라니! 주디, 설마 네가 직접 만든 거야?"

"당연하지.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내가 직접 만든 거라고."


누가 봐도 토끼가 만들었다고 상상도 못 할 근사하게 생긴 케이크가 당신의 눈앞에 있다고 해보자.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짓겠는가? 앨리스는 깜짝 놀라 두 눈이 동그래졌는데, 그건 '토끼'가 케이크를 만들어서였다. 하지만 주디가 앨리스의 표정을 보고 어깨가 으쓱한 건 앨리스가 그저 자신의 솜씨에 매우 감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주디는 헛기침으로 앨리스의 시선을 끌더니 자신의 케이크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 케이크로 말할 것 같으면 나의 27번째 작품이지."

"우와! 그러면 27번째로 만든 케이크라는 거야? 멋지다!"


어쩌면 사바나에서 토끼가 케이크를 만드는 일은 아주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앨리스의 뇌리를 스쳤다. 그게 아니라면, 주디가 말한 사바나 고등과정에서 특수 훈련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주디, 그런데 한 조각은 어디 있어?"

"내 뱃속에. 만들었으면 맛도 봐야지. 이번 케이크는 26번째보단 낫지만 아직 2% 정도 부족한 느낌이야."

"응? 2%가 부족하다고? 어떤 부분 때문에?"

"어휴, 그걸 알면 내가 '2% 부족한 느낌'이라고 말했겠니. 그게 내 속을 시끄럽게 했다고!"


주디는 어질러져 있는 식탁을 행주로 닦고 치우며 말했다. 2% 부족한 느낌이라. 앨리스는 그저 토끼와의 이 복잡한 심경의 대화가 신기했다. 앨리스는 주디에게 자신이 도울 것이 있는지 물었는데, 손이 빠른 주디는 어느새 부엌을 깨끗하게 정리해버렸다.


"괜찮아, 다 했어. 앨리스, 그쪽에 앉아."


포크와 찻잔까지 세팅을 마친 주디는 당근 케이크 한 조각을 접시에 담아 앨리스 앞에 놓았다. 세상에, 토끼에게 얻어먹는 당근 케이크라니! 앨리스는 당근 수프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주디는 맞은편 자리에 앉아 앨리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앨리스는 짧게 식사 기도를 한 후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세상에, 너무 맛있다! 사실 나 당근 케이크 좋아하는데, 이건 진짜 정말 너무 맛있어, 주디!"


앨리스의 말은 진짜 정말 사실이었다. 앨리스의 감탄은 주디의 씰룩이는 입꼬리를 불러냈고, 시끄럽다던 주디의 속은 왠지 차분하게 가라앉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네. 부족하면 더 먹어, 앨리스."


그렇게 흰 토끼와의 점심 식사가 시작되려던 그때, 현관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현관문을 닫고 들어오는 토끼 두 마리, 아니 주디의 부모님이 보였다. 주디의 부모님은 주디에게 집에 돌아왔다는 인사를 했다. 앨리스는 포크를 내려놓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할 준비를 했다. 부엌으로 한 걸음에 걸어온 주디의 어머니가 앨리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머, 역시 머쉬 말이 맞았어요. 반가워요. 앨리스 맞죠?"

"반가워요, 앨리스. 나는 주디 아버지, 오스틴 알레그로(Austin Allegro)입니다. 그냥 오스틴이라고 불러줘요."


'제 이름은 얼린(Eearlene)이고요, 회사에서 저는 얼 대리라고 불리지만…, 그런데 왜 저를 앨리스라고 부르시는 거죠?' 이렇게 멋대가리 없는 자기소개를 머릿속으로 짧게 준비해봤지만, 도리어 어처구니없는 질문으로 빠질 것 같아 앨리스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아,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주디가 초대해 줘서 오게 되었어요."

"그랬군요, 식사 중이었나 봐요. 편히 있어요."


주디의 부모님은 주디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주디 어머니 알레그로 부인의 뒤를 따라 들어온 오스틴 씨는 벗은 모자를 식탁 한 구석에 내려놓으며 부인에게 무언가를 가방에서 꺼내 달라 말했다.


"어머, 당신이 말하지 않았으면 정말 깜빡할뻔했어요! 앨리스, 우리가 집에 오는 길에 누구를 만났는지 알아요? 닥터 머쉬를 만났어요. 아주 오랜만이었죠. 잠깐 서서 안부를 묻는데 머쉬가 이걸 주더라고요."


주디 어머니는 작은 가방 안을 한참이나 뒤적였다. 그러더니 보온병을 꺼내 앨리스에게 건넸다. 어떻게 그 작은 가방 안에 보온병이 들어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앨리스는 보온병을 받아 들었다.


"저를 주시는 건가요?"

"그럼요. 머쉬가 앨리스를 만나면 꼭 전해주라고 하더군요."


보온병 넘겨준 것이 매우 흡족할만한 일인듯한 표정을 지으며 오스틴 씨는 계속 말을 이었다.


"보온병에 든 건 영지버섯 차예요. 머쉬 말에 따르면 갈색으로 물든 앨리스의 머리카락을 위해서라더군요."

"마침 식사 중이었으니 이 차를 함께 들어요, 앨리스."


이런 경우에는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맞는 걸까. 주디는 이제야 앨리스의 머리색에 대해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앨리스 머리카락 색이 좀 이상하다 했어."


주디의 말에 앨리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여전히 설명해야 할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지만 도무지 그 이야기를 풀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디는 애써 미소 짓고 있는 앨리스에게 영지버섯 차를 따라주겠다고 했다. 앨리스는 주디에게 보온병을 넘겨줬고 주디는 앨리스의 찻잔에 영지버섯 차를 가득 따랐다.


알레그로 부인은 접시와 포크를 두 세트 더 준비했다. 오스틴 씨는 앨리스의 찻잔을 제외한 나머지 찻잔에 향긋한 차를 따랐는데, 확실한 건 영지버섯 차는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이름 때문인지, 알레그로 부부의 빠른 손놀림에 앨리스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앨리스의 옆자리에 앉은 알레그로 부인이 앨리스에게 물었다.


"앨리스, 당근 케이크 맛이 어떤가요? 혹시 주디가 몇 퍼센트가 부족하다고 하던가요?"


맞은편에 앉은 오스틴 씨도 앨리스의 대답이 궁금하다는 듯 앨리스를 빤히 쳐다봤다.


"정말, 맛있었어요. 제가 당근 케이크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주디는 2% 부족하다고 했는데, 사실 저는 전혀 모르겠어요."


정말 솔직한 답변이었다. 오스틴 씨와 알레그로 부인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말을 했다.


"주디, 26번째 케이크 먹었을 때 아빠가 했던 말이랑 똑같지?"

"역시 이번에도 잘 만들었을 줄 알았어, 주디! 우리도 어서 먹어봐요."


상기된 얼굴로 케이크를 반듯하게 잘라 접시에 담는 주디를 보면서 앨리스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주디는 28번째 케이크를 만들까?'

'31번째 케이크를 만들 때쯤에는 더 이상 부족한 느낌은 들지 않을까?'

'그래도 칭찬 한 마디에 케이크 하나라, 꽤 그럴만한 가치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