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아이디의 팔할은 '맥락 Context'로부터-
프리랜서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평일 낮시간의
영화관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대학을 다닐 때 (그런 날이 있었는지)
개봉 영화들의 조조 상영을 보기 위해
(관객은 적고 요금 할인의 혜택까지!!)
학기 초 수강 신청할 때마다 강의 시간을
최.대.한 오후로 몰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얼마 전 매우 선호하는 감독의 최신작이
국내 개봉 전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터라
개봉 즉시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개봉 초기의 영화관이 붐빌 것을 고려해
최대한 대중교통이 불편한 영화관 중에서도
하루 중 최대한 애매한 시간을 골라 갔습니다.
그 애매한 시간은 저에게는 2~4시 사이입니다.
먼저 오전 시간이 붐빌 가능성입니다.
전날 저녁 모임에서 과하게 마신 탓에
도.저.히 정시 출근이 불가능할 때나
평일에만 볼 수 있는 일을 처리해야 할 경우
우리는 대개 오전 휴가나 반차를 냅니다.
이처럼 영화 마니아가 오전 휴가나 반차를 내면
평일 오전 느지막이 일어난 후 영화를 본 다음
간단히 오후에 출근할 수 있습니다.
오후 시간의 경우, 대략 3~4시쯤 외근 등을 핑계로
사무실을 나와 영화를 본 다음 퇴근시간이 다 되었으니
상사에게 연락해 현장에서 바로 퇴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시에 시작해서 4시 정도에 끝나는 상영시간대가
일반 샐러리맨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시간대라고 생각합니다
고작(!) 영화 하나 조용하게 보려고 금쪽같은 휴가 하루를
통째로 쓰기는 쉽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큰 만큼 영화관에도 조금 일찍 도착해
자리를 찾아 편안하게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기대하고 예상한 만큼 관객은 아주 적었고
에어컨의 온도마저 적당했습니다. 다만,
평소보다 조금 여유 있게 입장한 탓에 관객의 숫자보다
더 많은 편수의 앞 광고를 봐야 했습니다.
영화 상영 시작에 딱 맞춰간다! 는 평소 신념과 달리’
서둘러 조금 일찍 오니 이런 문제가 있었네~ 하고 생각할 때
멀지 않은 곳에 앉은 커플의 대화가 귀를 간질이기 시작했습니다.
영화도 아니고 영화 상영 전에 걸린 광고에 대해
무슨 하실 말씀들이 그렇게도 많은지
그나마, ‘광고 중이라…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영화 상영 중엔 안 그러겠지!’를 수만 번 되뇌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영화가 시작되었지만
그 커플의 대화는 식을 줄 몰랐습니다.
영화에 대한 설명을 하다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중간중간에 탄성 탄식 감탄의 추임새를 넣다가-
한국 영화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배우들의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
극장 오디오의 기계적 요인까지 더 해져
나중에는 남녀 배우의 대사 대신
그 커플의 목소리가 오버랩되는 해괴한 경험까지—
영화는 거의 집중할 수 없었던
그래서, 꼭 다시 봐야겠다는 결심에
꼭 다시 볼 수밖에 없다는 결심을 얹어
‘조용히 좀 하라!’는 말을 간신히 참았습니다.
그렇게 영화가 가슴 아프게 마무리되고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 중의 하나인 주제가가
하염없이 올라가는 엔딩 타이틀 위로
조용히 오버랩되기에
그 노래에 마음을 식히고 또 삭이고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실은 몇 안되는) 관객들 역시
저처럼 그 엔딩 타이틀 곡을 들으며
영화의 여운을 조금 더 감상 중이었습니다. 만
쉼 없이 떠들던 커플이 조금 일찍 켜진 조명 아래
벌떡 일어선 다음 상영관을 한번 휙 둘러보곤
‘아니, 영화 끝났는데 왜들 안나가!’라고 하더군요.
정말 손에 꼽을 최악의 경험에
아주 확실하고 단단한 마침표를 찍어 줬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은
영화 상영시간 내내 끓어올랐던 ‘짜증’보다
자신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자신들의 목소리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왜 그렇게 의식하지 못할까 궁금해졌습니다.
자신의 청력이 떨어질수록
상대방은 그렇지 않음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한껏 높인다고 합니다.
그분들 역시 현재 자신들의 위치와 상황에 대한
이해(맥락!)가 부족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극장은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타인과 연결시킨다
- <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
아이디어의 시작은
‘관계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됩니다.
아이디어를 낸다는 것은
이것과 저것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
이것과 저것의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할 때
가장 먼저 ‘이것과 저것’. ‘나와 너’ 사이의
배치, 거리, 태도, 관계와 의미를 알고
그것을 새롭게 재조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이디어 회의 때
그저 개수만을 채우기 위해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같은
아무 맥락 없는 이야기나 주장은
팀원 서로의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무엇보다 관계를 위해
꼭 삼가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왕 영화이야기를 꺼냈으니
최근 넷플릭스에서도 공개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우연과 상상'의 이야기를 하나 더 하면서
스을쩍 결론을 대신해볼까 합니다.
(얼마전 넷플릭스에도 업로드되었습니다.)
'우연과 상상'은 3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었고
그 두 번째 ‘문은 열어둔 채로’는 작품을 인정받아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자 대학교수와
그의 강의를 듣는 늦깎이 주부 대학생의 이야깁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영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교수는 자신의 글을 쓴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말의 배치는 다른 말과의 관계에서 결정됩니다.
말이 말을 원하는 것이지 내가 말을 원한게 아니에요.
완성된 말의 순서가 내 기준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면
그대로 둘 뿐이에요
의미를 만들어 내는 말의 ‘배치’는
결국 말과 말의 ‘관계’에서 빚어지므로
자신은 그런 말과 말의 관계/배치/순서를
고민한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아이디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사회라는 것 역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확장되고
총합된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므로, 아이디어를 내는 이에게
적어도 ‘맥락없는 소리하고 있네~’는
가장 큰 비난이자 욕이라고 생각해야 할 듯합니다.
* 매주 화/목요일에 업로드합니다.
PART 2. 석 달 후를 위하여: 크리에이티브의 문법 (아이디어의 작동원리 이해)
Chapter 4. 거리와 스케일
011. 크리에이티브, 멀수록 빛나는 : 아이디어의 규모와 스케일
012. 맥락 없는 소리하고 있네 : 아이디어는 CONTEXT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