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거나말거나라 시리즈 4
'딸랑' 하고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며 오늘의 첫 손님이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얼굴을 힐끗 보니 둘 다 고등학생 같아 보였다. 나도 저 나이 때에는 ‘시간이 왜 이렇게 늦게 흘러가는지,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1 년쯤 지나갔으면’하고 바랬을 만큼 답답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상점에서 미성년자와 거래를 하는 건 아주 크고 무거운 죄가 된다. 때문에 반드시 신분증을 요구해서 성인인지를 확인해야만 한다.
키가 큰 녀석이 먼저 이야기를 한다.
"시간을 좀 팔려구요?"
"얼마나…?" 하고 묻자, 이번엔 키가 작은 쪽에서 답을 하고 나선다.
"좀 넉넉하게? 아니 팔 수 있는 만큼 최대한이요"
"아시겠지만 미성년자에게는 시간을 팔고 사는 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신분증을 먼저 보여주셔야 합니다."라고 하자,
다시 키가 작은 쪽에서
"아저씨, 우리가 몇 살 같아 보여요? 지금 우릴 고딩으로 보는 거예요?"하고 피식 웃는다.
그 옆에 있던 키가 큰 쪽에서 호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건네준다. 신분증 속의 사진과 지금 내 앞에 선 인물의 머리 모양이 너무 다른 데다 신분증이 주머니에서 마구 다뤄진 탓에 사진 역시 뿌옇게 보여 같은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모르겠다. 이럴 땐 만일을 대비해 신분증의 인적 사항과 연락처를 기록해 놓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에게 돈을 지불하면서 부디 그 돈이 좋게 쓰이기를 기도했다. 상점을 나가는 그 둘의 뒷모습은 한껏 들떠 있어 보였지만.
믿기 어렵겠지만 지금 내가 일하는 곳은 시간을 팔고 사는 상점이야. 그런 게 어디 있냐? 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잘 생각해 봐. 우리는 어쩌면 이미 오래 전부터 시간을 팔고 사 왔다고. 박물관에 놓인 아주 오래된 도자기를 생각해 봐. 밥그릇으로도 쓸 수 없는 그 낡아 빠진 그릇들이 왜 몇천만 원, 몇억 원이나 되겠어? 그건 모두 그것들이 몇백 년의 시간을 담고 있기 때문이잖아. 이렇게 그것들의 가격은 도자기 때문이 아니라 도자기가 품고 있는 시간의 무게 때문인 거라고. 다만 우리는 그렇게 어떤 물건에 들어있는 시간이 아니라 순수한 시간 만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평가해서 사고파는 거야. 이젠 이해가 좀 되지? 그러면 상점은 어떻게 생겼냐고? 음. 그건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귀금속이나 최고급 시계를 파는 귀금속 상점을 생각하면 될 것 같아. ‘시간은 금이다.’라는 말도 있었잖아. 그리고 그 말처럼 시간의 가격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싸. 뭐라고? 너도 너의 시간을 팔고 싶다고? 하하하하. 시간은 아무나 사고팔 수가 없도록 법으로 엄격하게 제한이 되어있어. 특히 몸과 마음이 한참 성장할 시기인
너희 같은 미성년자들은 더욱더 그렇지. 같은 1시간이라도 나이에 따라 또 상황에 따라 그 무게는 완전히 다르니까.
다시 종이 울린다. 오늘의 두 번째 손님이다. 중절모를 쓴 노인이다. 하루하루의 시간이 더없이 소중한 노인들은 돈이 아주 급하게 필요한 사정이 아니면 자신의 시간을 팔지 않는다. 때문에, 노인들이 우리 상점을 찾는 이유는 대부분 시간을 사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문을 열고 들어선 저 노인의 머리 위에 놓인 낡은 중절모와 닳아서 얇아진 외투를 봐서는 과연 시간을 살만큼 돈이 있을지 조금 걱정이 든다.
‘저… 시간을 좀 살까 해서요?’하면 돈을 내미는 손에 주름이 가득하다.
‘얼마나 필요하세요?’
‘이틀 정도면 될 것 같아요. 더 많이 사고 싶지만 지금 저희 형편이 …’
‘어떤 분이 쓰실 건지요?’
‘제 집사람이요, 지금 큰 병에 걸린 지 오랜데 …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갔던 곳을
죽기 전에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네요.’
‘아, 네, 그러시군요’ 이런 사정을 들으면 나 역시 마음이 조금 무거워져 포장하는 손이 살짝 떨리곤 한다. 아마 조금이라도 더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다른 때보다 공들여 포장을 마친 다음, 작은 상자를 건네드렸다.‘좋은 시간 되세요’
노인은 그렇게 크지도 무겁지도 않은 상자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는다. 그리고, 마음이 담긴 인사를 한 다음 천천히 상점을 나간다.
앞서 왔던 젊은이들도 이 노인의 나이쯤 되면 오늘 자신들이 판 시간을 아까워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후회하지 않을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똑같이 주어진다. 나는 어렸을 때 그 지루한 시간들이 빨리 흘러가서 조금이라도 일찍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돌이킬 수 없는 그 시간들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또 그립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얼굴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라 더욱 그렇다. 그때에도 시간 상점이 있었다면 나는 그때의 시간들을 이곳에 저축해 두었다가 필요한 때에 다시 찾아 그 시간들을 더없이
소중하게 곱씹어 봤을 텐데.
얼마 전 한 신문에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부자와 빈자의 차이는 오래된 문제였지만 이제는 그것이 시간에서까지 부자와 빈자를 만들고 있다.’면서 그것들을 더 심화시키는 우리 같은 ‘시간 상점’을 지금 당장 폐쇄시켜야 한다고 쓴 기사를 봤던 생각이 난다. 하지만, 시간 상점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히 있다. 큰 병으로 수술을 하고 피가 모자란 사람에게 피를 나눠주는 헌혈처럼 ‘시간’ 역시 아주 급박하게 필요한 사람들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너무나도 가난한 사람들이 판 시간을 부자들이 구입해서 쌓아두고 여유롭게 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모두가 자신의 시간을 저축할 수 있다면 바로 그때 우리 상점이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끝)
* 매주 화/목요일에 업로드합니다.
PART 2. 석 달 후를 위하여: 크리에이티브의 문법 (아이디어의 작동원리 이해)
Chapter 4. 거리와 스케일
011. 크리에이티브, 멀수록 빛나는 : 아이디어의 규모와 스케일
012. 맥락 없는 소리하고 있네 : 아이디어는 CONTEXT로부터
013. am 11.의 문자메시지를 씹은 이유 : TEXT와 CONTEXT의 차이
Chapter 5. 기준을 만드는 자가 이긴다
014. 기준을 만든다는 것 : 의제 설정 혹은 평가자 되기기준
015. 신조어가 유행하는 까닭 : 만들기와 자리잡기 사이
016. 두 점을 잇는 가장 짧고 빠른 건 '직선' : 결국은 컨셉
Thinking Fable. 4 _ 시간 상점
(예정)
Chapter 6. 질문의 기술 : 일상에 시비 걸기
017. 시비 걸기 I : 이것은 '에코백'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