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오늘 눈 엄청 많이 왔어요. 저는 눈이 좋은데 엄마는 싫대요.” 센터에 문을 열고 들어오던 아이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건다.“그래? 엄마는 눈이 왜 싫으시데?” 짐짓 이유를 알 것 같지만 나는 물었다.“모르겠어요. 눈이 오면, 길이 미끄러워지고 더러워져서 싫대요.”
밤부터 아침까지 눈이 많이 내렸다. 며칠 전 우리가 모두 자던 밤에 첫눈이 몰래 왔었다고 했지만, 내가 실제로 본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오늘 내린 눈은 나에겐 첫눈인 셈.
아이들은 눈을 참 좋아한다. 밤새 내린 눈이 아침 햇볕에 이미 녹아버린 것을 알면서도 밖에 가서 눈싸움을 하자고 선생님을 졸라댄다.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왔다. 다 녹아버려서 남아 있지도 않은 눈인데도 아이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눈덩이를 만든다. 눈싸움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저 눈 장난에 불과하지만, 그마저도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일이다.
어린 시절에 나 또한 눈을 굉장히 좋아했었다. 눈이 내리고 나면 세상은 온통 하얀색으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눈이 내리는 날은 추운 겨울이었지만, 그날만큼은 나에겐 따스한 봄이었다. 손과 발이 시린지도 모른 체 눈밭을 뛰어다니며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이 오는 날만큼은 모든 일상에서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마냥 행복했다.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눈이 오는 것이 행복한 일만은 아니게 되었다. 아침에 눈이 오기라도 하면 출근길에 기어갈 버스가 걱정되고, 내리는 눈에 머리가 망가질까 우산을 쓰고 출근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겼다. 눈 오는 장면을 바라보는 것은 퍽 낭만적인 일이었으나, 그 후엔 낭만에서 벗어나 현실을 대비해야만 했다.
예쁘게 내린 눈은 멋진 등장과는 달리 처참한 퇴장을 해야만 했다. 밤새 내린 눈은 소복이 쌓여 아이들의 놀이의 용도로 사용되거나, 사람들의 발에 밟힌 후에는 거리의 한구석에서 조용히 녹아 사라질 뿐이었다. 뽀얗던 눈에 온갖 오물이 묻어 회색빛을 띄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파왔다. 그것은 마치 고귀하게 피었다 도도하게 낙화한 목련과도 같았다.
목련. 네 녀석도 아름답게 피었다 사람들 발에 밟혀 처참히 사라지는 존재 중에 하나였다. 처참히 사라지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니 눈이 내리는 것을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퍽 난감해졌다. 한참 생각에 잠겨있는 네게 아까 말은 건 아이가 다가와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런데요 선생님 저는 엄마랑 생각이 달라요. 더러워져도 결국 눈이잖아요. 예쁜 눈. 그래서 저는 눈이 좋아요.”
아이의 말은 내 마음속을 쿡 하고 찔러댔다. 현실을 사느라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마지막이 어떻든 존재 자체로 아름다운 눈. 세상을 하얗게 변화시키고 누군가에게는 자유를 혹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너는 그저 눈이었다. 이처럼 찬란하게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모든 존재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