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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 클레어 Aug 15. 2021

카이 그리고 겔다

인간이란 야누스의 두 얼굴로 바라본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

 겔다, 나의 구원자. 이토록 새하얀 망각 속에서 떠오르는  하나의 이름. 그런데도   얼굴과 냄새와 온기  무엇 하나 기억할 수가 없어.  눈송이를 닮았을까. 가장 순수한 찰나만을 살다  위험한 세상에 닿으면 사르르 숨어버리잖아. 그런데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달라. 여긴 온통 눈송이로 이루어졌거든. 여왕님의 명령에 따라 사람들이  궁전을 들고 우리가 먹을 음식들도 나르고 있어.  도시는 매일 새로운 사람들로 넘쳐나. 그래서 그만큼 더 많은 방을 짓고 다양한 음식을 구하러 다니느라 눈송이들은 정말 바빠.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다르지만   같아. 우리의 눈엔 모두 빛나는 조각이 있어. 이곳의 음식이 항상 차가운  바로  때문이야. 김이 서려서   없게 되면 여왕님께 혼난다고 눈송이가 알려줬거든. 그런데, 그래서 우린 서로를   없어. 다른 사람들을 바라봐도 서로 빛나고 빛나니까 온통 나만 보여.  거대한 도시에서 우린 모두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어.  


 오늘도 조각을 다 맞추지 못했어. 여왕님이 소풍 가시기 전날, 나를 불러 이번엔 ‘영원’을 만들라고 하셨거든. 여왕님은 눈송이만큼 바빠. 그들이 새로 온 사람들을 잘 돌보고 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시다가, 초승달이 뜨는 밤이면 저 멀리 소풍을 떠나. 그러고 나면 곧 새로운 사람들이 여왕님과 함께 이 도시로 찾아오는 거야. 그 어느 날의 나처럼. 나는 이 도시에 살면서 꽤 많은 조각들을 맞춰왔어. 나만큼 끈질기게 조각들을 찾아서 하나씩 붙여보는 사람이 많지 않았거든. 그래서 내가 이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셨나 봐. 하나를 맞추면 또 바로 새로운 단어들을 주셨어. ‘사랑’, ‘믿음’, ‘소망’ 같은 단어들을. 어떤 단어는 일주일이면 됐는데 어떤 단어는 몇 달이 걸린 적도 있어. 왜인 줄 아니? 얼음 조각마다 반응이 다르기 때문이야. 어떤 얼음들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또 다른 얼음들은 서로 엄청 밀어 대거든. 정말 예쁜 조각인데 도저히 그와 붙을 조각이 없으면 난 그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 그렇게 서로 붙을 수 있는 얼음 조각들을 다 찾으면 드디어 한 단어가 완성되는 거야. 그 순간 완성된 단어는 하늘 높이 올라 여왕님의 궁전 중앙을 장식해. 오직 여왕님만 그 의미를 간직하도록. 그렇게 되면 이 도시의 사람들은 그 단어가 무슨 뜻이었는지 영영 잊고 마는 거야. 그 단어를 만든 나 조차도. 이 영원이란 단어가 맞춰지면 어떻게 될까. 영원이 사라진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이렇게 내 방에 누우면 겔다, 네 모습을 천장에 그려봐. 너는 어떤 사람일까. 우린 언제 어디서 만났을까. 너는 나를 뭐라고 불렀을까. 너는 지금 어떤 세계에 있지? 혹시 이곳의 누군가는 아닐까? 우리는 서로 볼 수 없으니까. 그럼 우린 어떻게 서로를 알아볼 수 있지? 누구인지도 모를 너를 기다리는 날 알까. 정말 언젠가 나를 만나러 와 줄까. 넌 나와 많이 다를 거야. 내가 이토록 두려워하는 바깥세상을 직접 만나고 온 용감하고 담대한 사람일 테니까. 아, 새하얀 눈의 도시. 난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이보다 아름다운 곳은 없을 거라고 눈송이들이 속삭이지만 사실 난 지쳐가고 있어. 이곳 사람들은 늘어나지만 그 누구도 볼 수가 없어. 내 온 힘과 정성을 바쳐 모은 얼음 조각과 단어는 결국 여왕님만의 것이 되어 사라지고 있어. 아무것도 남지 않아. 순백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눈송이가 아닌 모든 건 결국 사라져야 하는 곳이야 이곳은.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언젠가 여왕님이 내게 '카이'라는 단어를 맞추라고 명하시는 그런 꿈을 꾸고 있어. 그전에 내가 널 만날 수 있을까.


 카이, 내 영혼의 주인. 난 네 가까이에 있어. 네 심장 근처의 그곳. 너를 찌르는 거울 조각을 피해 다니며 너에게 외치고 있어. 내 소리가 들리니? 귀 기울여봐. 그 어떤 말이나 행동보다 진실한 건 오직 눈물뿐이야. 진심으로 너와 이곳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길 원하니? 지금 너와 함께 있는, 보이지 않는 그들의 마음 풍경을 상상해봐. 다른 이들을 믿지 못하고 자신에게만 깊이 빠져버린 사람들, 눈송이들의 환대에 이곳을 사랑했지만 곧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고독과 절망 속의 그들은 너와 다르지 않아. 저마다 겔다, 내 이름을 외치며 손 내밀어줄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지. 그런데 카이, 보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다면 만질 수 있어. 네가 먼저 용기 내어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줘. 그를 위로하고 싶은 네 마음이 진심으로 그에게 닿는다면 네 눈의 조각은 뜨거운 눈물과 함께 흘러내릴 거야. 마침내 그도 너를 발견하고 너를 사랑으로 안을 때 네 심장의 조각도 녹아 사라질 거야. 서로가 서로를 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 어려운 시작에 도전해야 해. 나는 그게 너라는 걸 잘 알아. 그게 네가 이곳에서 얼음 조각을 가장 잘 맞추는 이유이니까. 너도 이미 알고 있어. 네가 얼음의 눈물을 발견한 유일한 사람이란 걸. 두 조각이 하나 되려면, 한 얼음이 다른 얼음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걸. 스스로 녹아 작아지는 건 두렵고 어렵지만 누군가 시작해야 하는 일이야. 카이, 네가 너의 구원자야.   


 겔다,  소리를 들은  같아. 꿈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너였을까.    없지만 느낄  있어. 정말 중요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니까. 너도 이곳 얼음의 비밀을 알고 있었구나. 처음  얼음을 보았을    눈을 의심했어.  우는 걸까.  얼음에게 다가가고 싶어 라고 한 얼음 조각이 내게 울먹였어. 난 그저  소리를 들었을 뿐이야. 울고 있는 얼음을 울지 않는 얼음 가까이 보내주니 신기하게도 서로를 끌어안았어. 그게 아마 '희생'이었던  같아.  오래전에  단어를 맞췄으니까. , 그런데 겔다. 내가 무슨 일을  걸까. 그것들은 이제 모두 여왕님의 것이야.  얼음들은 서로를 안아주려고 눈물을 흘린 건데  신이 나서  눈물들을 모아   사람에게 바쳐버렸어. 그래서 이제 아무도 그런 따뜻한 무언가를 기억할  없는 거야. 내가 저지른 일이 너무 무서워. 내가  일을 알면 그들이  손을 뿌리칠  같아. 내가    있지? 녹아버린 얼음들에게, 눈과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혹시 말이야. 내가 궁전의 중앙에 닿을  있다면? 내가 만든 단어 조각들을 따라 날아오를  있다면? '영원' 맞추는 순간,   단어 조각을 품에 안을게. 살이 에이도록 시리겠지만 얼음들에게 미안했다고 눈물을 흘릴 거야. 겔다, 그때 내가 잠들지 않도록  노래를 들려줘.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카이를 만났습니다. 수려한 그에게서 반짝이는 조각을 보았고 걷어내고 싶어 손을 내밀었습니다. 내가 겔다인 줄 알고 조금씩 벽을 허무는 그에게 감사했지만, 이내 더뎌지는 속도에 인내심은 급히 바닥이 났습니다. 이제 그만 그가 나를 위한 겔다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를 위한 겔다가 될 줄 알았던 난 또 하나의 카이였습니다. 누구의 조각이 더 날카로운지 겨루다 우리는 그렇게 멀어졌습니다.

 동화 바깥의 우리는, 누구도 영원한 카이나 겔다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카이이자 겔다인 야누스의 삶은 몹시도 불완전한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변성을 믿어 카이의 인력을 딛고 겔다의 척력으로 향하는 어느 매직 아워의 순간, 우린 또 다른 그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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