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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 클레어 May 29. 2022

내가 분리되는 순간의 기쁨과 슬픔과 잔망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읽고

'여행'과 나 사이엔 이토록 깊은 오해가 있었다. 메스트르의 방을 들여다보기 전까지. 어느덧 성큼 다가온 휴가의 계절 앞에서 그 이름만으로 무심코 설레고 들뜨던 '여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일정과 비용을 결정짓는 국가와 도시의 선택이 중요했고, 오래된 동행자라도 짐짓 멀어질 수 있는 변수를 의식했으며, 훗날을 위한 사진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날씨 운을 빌었다. 점차 블로그와 구글맵과 트립어드바이저의 도장깨기에 환멸을 느끼며 비로소 나만의 나를 위한 나에 의한 작은 도전과 우연을 버무린 여행들을 기획하고 실현해나갈 수 있었다. 일상을 벗어난 여행에서조차 '성공'에 대한 강박으로 누군가의 기준에 맞추려는 조바심을 내려놓았다.  실패와 실수를 허용하는 여유가 뜻밖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다분히 의도적이며 자발적인 공간과 장소의 전환'이야말로 여행을 위한 불변의 전제조건이라 믿으며 코로나를 탓하던 내게, 금지된 결투로 42일간의 가택연금을 겪었던 18세기 말의 메스트르는 그 누구보다 진보적이며 혁신적인 '여행'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었다.


 그가 초대하는 첫 번째 여행은 '내가 분리되는 순간'이다. 영혼과 동물성이란 직설적이고 간명한 이분법으로 그는 자신을 해체시킨다. 무시로 그림과 아름다운 여인을 향한 상념의 여정을 떠나버리는 영혼 덕분에 그의 동물성은 자주 경로를 이탈하거나 불에 데거나 무릎을 찧는 수난을 당한다. 결국 '멍' 때리거나 '딴생각'을 한 것 아닌가 싶은 찰나의 순간들을 잔망스러운 시선으로 포착하던 그는 이것이 바로 한 인간으로서 두 개의 삶을 살 수 있는 황홀한 기쁨이라 노래한다. 이 경쾌한 정신승리의 리듬을 따라 그가 제안하는 두 번째 여행은 '타인과 동물에 대한 추억의 환기'이다. 실체로서 그의 곁에 존재하는 하인 '조아네티', 애견 '로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그리다 먼저 세상을 등진 벗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이르고, 벽에 걸린 그림과 책 속의 인물들까지 생생하게 복원하여 그의 방으로 소환한다. 얼핏 우디 엘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떠오르는 이 장면은 연금으로 인한 관계의 단절과 외로움을 극복하려는 그만의 파티였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그가 소개한 세 번째 여행은 '사물의 관점을 가져보기'이다. 사유하는 인류에게 이보다 유용한 물건은 없으리라 (의자), 꽃으로 장식된 요람에서 사랑의 옥좌가 되고 끝내 우리의 무덤자리가 되는 것 (침대), 군말을 허용치 않을 만큼 완벽한 걸작 중의 걸작 (거울). 열병 같은 사랑에 빠져 소비를 저지르고 난 후 급격히 무심해져 저마다의 위치를 잃고 뒤섞여버린 작고 소중한 나의 반려사물들에 다시금 눈길을 보내본다.


 이 압도적인 관찰자이자 이야기꾼이자 화가인 메스트르 이후의 여행은 그 영역과 개념이 무한대로 확장된다. 테이크아웃조차 여전히 두 시간을 기다리게 만드는 런던베이글 뮤지엄의 베이글을 한 입 베어 물으며 끝내 입성하지 못한 그 공간을 떠올려본다. 고궁과 한옥의 거리에 굳이 이방인임을 자처한 그곳을 들어가려 출국 심사보다 더 오래 기다리는 것은 이 한 입을 위함이 아니다. 베이글이란 오브제로 환기되는 그때 그 시절의 런던, 혹은 판타지로서의 런던 속에 머무는 '나'를 만나러 가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들고 떠날 트레바리 클럽도, 도시 답사도 하나의 작은 여행이 될 것이다. '휴먼스케일로 인식되고 체험할 수 있는 제한된 공간'이 건축이라면 메르스트식 여행은 가공할 상상의 힘으로 그 견고한 골조와 마감을 허물고 팽창하는 하나의 우주다. 그와 동시에 낯선 생각과 단단한 언어로 그만의 세계를 설계하고 완성해낸 이 '글'은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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