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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 클레어 Apr 10. 2022

'죽음의 중지 = 사랑'이란 실험적 아포리즘

「죽음의 중지」를 읽고

 <죽음의 중지>로 처음 만난 주제 사라마구의 이미지는 여러 개였다.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라는 단언적 문장은 에거사 크리스티 특유의 문체가 떠올랐고, 소제목의 구분 없이 무심하게 연결된 문단과 기호가 배제된 대화문은 어딘지 도스토예프스키의 숨 가쁜 활자들이 생각났다. 희화화된 정부 관료의 삽화는 고골이, 마성의 젊음으로 의인화된 죽음은 뮤지컬 '엘리자벳'의 토르와 영화 '조블랙의 사랑'을 연상시켰다.


 죽음의 실종 - 그런데 국경 안에서만 - 그런데 사람만 - 죽음의 귀환과 불사의 편지 (7개월 휴가) - 죽음 색출 (성별과 이미지) - 반송된 편지와 죽음의 분노, 당황 - 죽음의 유혹과 복수와 사랑

마치 액자소설 같던 본 소설의 구성은 7개월 만의 장기 휴가를 마친 죽음의 복귀를 기점으로 시간의 전후가 연결된다. 나는 의인화된 죽음이 오롯이 드러나기 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죽음의 당혹스러운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의 번민과 갈등, 오묘한 질서와 거래 따위에 더 매료되었다. 사라마구가 설계한 죽음 중지의 비순차적 단계와 범주를 끄적이며 그 의도를 짐작하고 추측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왜 하필 왕과 총리가 있는 가톨릭 국가라는 설정일지, 국경 너머의 죽음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욕망이 배제될 때 '죽음'조차 상품으로 거래되는 인간계에서 가장 활기를 띄는 집단은 누구인지,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일단 당장은 영원할 것 같은 삶은 축복인지 저주인지 곱씹어볼 요소가 무궁무진했다.


 그런데 그만 멈췄던 죽음이 다시 돌아와 '영원의 맛을 보여주려 했고, 이제 다시 궁극의 공포를 되돌려주겠으니, 체념하고 저항 없이 죽으라'던 카리스마적인 모습은 온 데 간데없고 느닷없이 잠든 첼리스트에 반해 다시 멈춰지던 후반부는 다소 석연찮았다. 잠도 없이 뼈가 앙상해지도록 열일하던 죽음이 본인 존재의 의미라는 굴레를 벗어나 스스로의 운명에 반항하는 일탈은 경쾌했으나 거기 까지였다. 차라리 '생명이 계승됨을 막지 못하는 (작은) 죽음'이기에 소문자를 쓰는 죽음과, 거론조차 어려운 대문자 죽음과의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줬다면 더 흥미로웠을 것 같다. 죽음조차 무너뜨리는, 멈추게 하는 '사랑'이란 생의 감각으로의 소설적 설계와 전개가 전반부만큼 촘촘하지 못했던 건지, 내 집중력의 한계였던 건지 재독이 필요한 듯하다.


 오랜 습관으로 되내어지는 사도신경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진정 영원히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늘의 천사도 유한한 인간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순간의 소중함'이란 선물을 위한 우리 삶의 전제조건을 부둥켜안고 오늘도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거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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