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 클레어 Apr 10. 2022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미국의 목가 1, 2」를 읽고

■ 완벽으로 기억될 뻔한 타인의 삶, 스위드는 개츠비가 아니었다


 대체로 새 책의 헐렁한 스킨은 과감히 벗긴다. 자세히 보니 조금 무섭던 흑백사진과 다소 밋밋한 제목의 겉옷을 벗고 펼친 1권 1장은 아이싱이 잘 둘러진 레몬 케이크였다. 금발의 얼굴천재 겸 운동천재의 등장에 온 마을과 학교는 환호하고, 60여 세까지 이 동네 형에 대한 팬심과 판타지를 이어가던 작가 주커먼은 운명처럼 재회한 그의 철저한 무개성에 강한 의구심을 남긴다. 동창회란 망각의 강을 역류하며 주커먼이 다다른 과거, '뭔가가 되어라!'는 집단적 도취에 몽롱했던 대공황 이후에서 만난 스위드는 더 이상 2차원이 아닌 3차원이 된다. 장르는 하이틴 학원물에서 서스펜스 넘치는 미스터리가 된다.


 '폭풍의 언덕'처럼 충격적 일상이 끊임없이 휘몰아치던 스위드의 삶 끝에서 생각한다 (같은 출판사의, 같은 디자인을 읽었던 나는 또 그 책이 생각났다). 개인과 가족과 집단과 사회와 국가와 종교를. 이 우주 어느 좌표를 택하고 그곳에 스스로를 붙들어 매는 신념, 구분, '정체성'은 정녕 어디서 탄생하는 것일까. 하루하루를 '산다'는 행위의 부지불식간 축적. 그 혼돈과 깨달음을 잉태하는 물리적 존재의 환경. 그 불가항력의 힘에 또 한 번 움찔한다. '자유'를 갈망하지만 삶에서 타인을, 그 존재를, 시선을 지워내는 일은 녹록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이다. 무리가 되어야 살 수 있는, 거울 없이 살 수 없는, 인정욕과 사회성의 존재. 그로써 자유하지 못함을, 혹은 합의된 부분적 자유를 택하는 존재. 왜 우리는 타인이란 지옥에서, 시대라는 감옥에서, 사회라는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가.


 주커먼이란 작가 화자의 등장, 베일에 싸인 완벽함, 아메리칸드림에서 개츠비를 떠올렸다. 야생의 백스테이지를 감추고 수미상관의 무시무시한 순애보로 삶을 향해 돌격하던 개츠비를. 그 마음을 삶으로 살아낸 위대함을. 그런데 스위드는 개츠비가, 불도저가 아니었다. 삶의 원점이 흔들릴 때 그도 함께 흔들렸다. 그 격렬한 정신줄과의 사투 속에서도 타인에게 우아한 외면과 자태를 유지할 수 있었음에 놀라웠다. 그리고 그의 무너짐에 나는 안도한다. 역시나 완벽한 인간은 없음에.



■ 아버지와 딸, 이질적 존재들을 관통하는, 지독히도 닮은 운명 (메리, 그녀는 과연 누구인가)


 신체적 능력, 외모, 인기, 순종과 반항의 삶에 대한 태도까지. 전혀 다른 두 인생에게도 교집합은 있었다. 이타심의 극단. 스위드와 메리는 타인을, 시대를 온몸으로 그들 삶에 담아내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았다. 그들이 운명처럼 빨아들여야 했던 시대의 조건과 상황이 그토록 극적으로 달랐을 뿐. 주류보다 뛰어난 비주류의 열망이 낳은 유대인의 아들 스위드, 미국이란 급성장의 부조리를 떠안은 딸 메리는 실존인물을 넘어선 거대한 상징적 존재로 기억된다. 그들의 비어짐에서, 내가 없는, 무아의 '공', 어떤 동양적 깨달음, 도의 경지를 체험한다. 메리가 그 경지를 견지했다면 스위드는 그에 끝내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서학이다 동학이다 부르는 우리는 개미다. 그런데 그 작은 개미의 존재도 서술의 관점이, 스포트라이트가 그에게 닿는 순간 더 이상 작을 수가, 가벼울 수 없다. 시대의 암울을 풍파를 머금은 개인은 우주를 뚫고 무한히 팽창한다.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시대의 전형. 그 안에서의 몸부림.


매거진의 이전글 '죽음의 중지 = 사랑'이란 실험적 아포리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