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사피엔스' 저자의 21가지 담론 제시
AI에 저숙련 노동자, 착취마저 못 당할 미래
IT·BT 기술 고도화...상위계층 신인류 진화
말 많은 '허구론자' 아저씨의 너무 많은 이야기
"우주서 자신 탐구만 오로지 진실"...명상 제안
'21세기를 위한'이라는 주제서 벗어나며 끝내
"인공지능(AI)과 로봇의 발달되면 실리콘밸리 기술 기업들은 인도의 저숙련 노동자들을 더 이상 착취할 필요조차 없어진다. 미국 등 AI 선진국은 더욱 부를 축적하는 반면, 개발도상국 국가들은 저숙련 노동 수출을 통한 '중진국 도약 사다리 타기' 기회를 잃는다."
저자가 예견한 가까운 미래의 모습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AI로 본격 운을 떼는 '21세기 담론서'라는 콘셉트는 저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습니다. 요즘 가장 궁금한 게 AI 시대의 노동 생태계였기 때문입니다.
파레토의 법칙이란 게 있죠. 일부 경영자나 인사전문가는 이를 인용해 어떤 조직이든 그 조직의 20%만 효율적인 성과를 내고 나머지 80%는 조직에 대한 기여도가 확연히 떨어진다고도 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저 또한 포함될 수도 있는) 이 하위 80%들, 평범한 우리 시민들도 먹고살 수 있었습니다. 산업화 이후에도 자동화에는 일정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기계가 못 하는 일을 해줄 노동 수요가 늘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AI가 급격히 발달하면서(1970~2010년 초반은 AI가 생각보다 빠르게 발전하지 않아 암흑기로 분류되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인간의 지능 이상의 범용 인공지능(AGI)이 개발된다면 이를 기계나 로봇에 장착해 많은 산업군에서 인간 노동자를 대체할 것입니다. 그간 자동화가 어려운 영역에서 종사하며 그럭저럭 먹고살 수는 있었던 '하위 80%'는 생존의 위기에 직면할 것입니다.
역작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예측도 이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는 "(AI 발달로 인해) 그렇게 생겨난 새로운 일자리는 모두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비숙련 노동자의 실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는 높은 실업률로 몸살을 겪으면서도, 기술기업들은 자신들에 맞는 숙련 노동력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할 거라고(현재 상당 부분 현실화된), 저자는 2018년 이 책을 통해 예견했습니다.
저자는 "AI는 앞으로도 계속 향상될 테고 따라서 인간 고용자는 반복해서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직업을 바꿔나가야 할 것"이라며 "정부가 개입해서 평생 교육 분야를 보조하고, 불가피한 전직 기간에 필요한 사회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는 해법을 내놓습니다. 그렇게 신박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해법이 꼭 신선할 필요는 없지요.
저자는 이 책에서 21가지 키워드를 제시하며 호모 사피엔스 미래의 문제를 예견하고 나름의 해법을 제시합니다. 구체적으로는 △환멸(자본주의체제만 남은 현실) △일 △자유 △평등 △공동체 △문명 △민족주의 △종교 △이민 △테러리즘 △전쟁 △겸손 △신 △세속주의 △무지 △정의 △탈진실 △공상과학 소설 △교육 △의미 △명상 등입니다.
보시면 시피 저자가 제시하는 키워드는 일률적인 기준에 따라 분류된 것도 아니고, 그 격도 서로 다릅니다. 목차 목록에서부터 이 책이 '저자가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말 다 하려고' 쓴 책이라는 예상이 가능합니다.
종교, 민족, 국가, 기업 등 인류사 발달로 이끌었던 모든 것들이 '이야기(허구)'였다고 주장하는 이 유물론자이자 허구론자는 정보기술(IT)과 생명과학기술(BT)의 고도화로 '인간 해킹'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우리는 인간 개개인을 '고유한 자기의지를 가진 존재'로 여깁니다. 하지만 최근 과학 연구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가령 감정은 모든 포유류와 조류가 생존과 재생산의 확률을 재빨리 계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생화학적 기제일 뿐이라는 것이죠. 인간의 직관이라는 것도 사실 빠른 시간 안에 결정을 내리기 위해 그동안 축적된 데이터를 통해 형성한 '패턴 인식'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과학의 고도화로 개개인이 어떤 과정으로 어떤 생각을 형성하는지 파악이 된다면, 인간 개개인의 마음을 해킹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이죠. 이때가 되면 우리 인류가 기존의 '인간관'을 유지할 수 없을 거라고 저자는 예상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저자의 무신론적 견해에 동의하지 않지만(과학의 영역은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범위까지 만이라는 점에서), 그가 이런 '이야기론(허구론)'를 제시하는 데는 불만이 없습니다.
문제는 '21세기를 위한~'이라는 제목의 책이 '명상'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는 21가지 주제 중 20번째 주제인 '의미'에만 63페이지를 할애(전체 493페이지의 약 15%)하고, 맨 마지막 '명상'에 13페이지를 씁니다.
이 두 챕터에서 저자는 '모든 것이 이야기(허구)이지만, 내가 자신을 관찰한다는 것(명상)만은 틀림없는 진실'이라는 점을 진지하게 설명하고, 명상의 가치를 제시합니다.
명상의 가치를 폄훼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문제는 과연 이 20~21번째 챕터-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로 보이는-가 '21세기를 위한~'이라는 책의 본질에 부합하는가입니다.
저와 같이 많은 독자들은 21세기를 어떻게 예상하고 준비해야 할까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명상'의 중요성이라는 메시지는, 저자의 주장이 완벽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양두구육이죠.
많은 예비 독자들을 유혹하려는 듯 책의 초반에는 AI, 민족주의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얘기를 잔뜩 하고는, 우리가 보통 핵심 메시지를 기대하는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145억 년 우주에서 수만 년밖에 안 된 사피엔스며 수천년된 민족이며 수백 년 된 국가가 그리 의미가 있느냐'는 투로 나옵니다. 또 아무리 명상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게 21세기 독자들만을 위한 내용도 아니고요.
그의 출세작 '사피엔스'와 '넥서스(지난해 출간)'는 각각 인류사 전반과 정보처리 발달로서의 인류사와 미래라는 특정 주제에 대한 것이기에 기대한 내용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이번 책은 제시한 키워드는 21개로 많은데 또 핵심 메시지는 생뚱맞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실망스러웠습니다.
아마 책 제목과 내용 전반부만 이렇게 구성하지 않았어도 속은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책을 사지는 않았을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