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수립'엔 한 인도 남성의 변심이 있었다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 2권'

by 생각하는T
UN한국임시위원단 의장 크리슈나 메논
南단독 선거 '반대'→'찬성' 의견 변경
'미인계說'까지...이승만 측근 女 "우정"

제주 4·3, 조부·손자 간 뺨 때리고
총살 때 가족들 박수치게 하는 등 잔혹행위
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촉발했지만
서북청년단·군경의 강경진압 영향 커

크리슈나 메논

대한민국 정부 공식 수립으로 이어지는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총선거가 이뤄지게 된 데에는 한 인도 남성의 변심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UN한국임시위원단 의장을 맡은 크리슈나 메논이 그 주인공입니다.

미국은 1947년 11월 14일 UN총회에서 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등 8개국으로 구성된 UN위원단 구성 결의안을 통과시킵니다. 이듬해 1월 크리슈나 메논을 비롯한 8개국 위원들로 구성된 UN위원단이 한국에 입국합니다.


크리슈나 메논은 초기에는 '통일 한국'에 강한 의지를 보입니다. 그는 1월 12일 서울운동장(옛 동대문운동장, 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있는 곳)에서 열린 군중대회에서 북한에도 애국적인 지도자가 있다며 "독립으로 충분하지 않다. 단결이 되어야 한다"라고 연설합니다.


그는 방송을 통해서도 "조선은 단일민족으로 동일한 언어를 쓰고 있으며 동일한 전통을 사랑하고 있다. 우리 위원단은 38선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방북 신청을 소련으로부터 거부당하는 등 UN위원단의 활동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1948년 한국은 정말 좌익과 우익이 격렬히 충돌하는 곳이었습니다.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은 총파업에 들어갔고, 좌익 진영의 공격으로 경찰 18명, 군중 70명 사망을 포함해 100명의 인명피해를 가져왔습니다.


김일성을 살해하려 할 정도로 이승만 박사 못지않은 극우 인사였던 김구 선생은 이때는 '통일 한국'을 지향하는 민족주의자로 변모해 있었습니다. 1947년 12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부사장 출신 정치인 장덕수가 암상당하는 일이 발생했고, 이승만 세력은 이를 김구 측 소행으로 몰고 가려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김구 극우 연합이 깨지고 김구 선생이 '좌우를 초월하는 진정한 민족주의자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 저자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평가입니다.


하지만 이승만 박사와 한국민주당(한민당) 세력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북에서는 그해 2월 조선인민군 창설을 발표하는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UN위원단 내부에서는 남한에서만 선거를 치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계속 제기됐습니다. 하지만 결국 3월 12일 찬성 4개국(중국, 인도, 필리핀, 엘살바도르), 반대 2개국(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기권 2개국(프랑스, 시리아)으로 UN위원단이 5·10 선거를 감시하는 것에 동의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애초 UN위원단 의장으로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강하게 반대했던 크리슈나 메논 스스로도 '찬성'으로 갈아탄 것이지요. 여기에는 '미인계'가 작용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여류 시인이자 훗날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한 모윤숙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메논은 1965년에 낸 자신의 자서전에서 1948년 남한 총선거 관련 결정에 대해 "이것이 나의 업무 수행에 있어 감정이 이성을 지배한 유일한 경우였다"라고 썼습니다. 모윤숙 스스로는 1983년 3월호 신동아 기고 '잊을 수 없는 메논 위원장과 나의 우정'에서 "만약 나와 메논 위원장의 우정이 없었다면 남쪽만의 선거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안 됐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은 어찌 되었을까?"라고 썼습니다.


이 우정이 '미인계'인지 '정치적 우정유대'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측의 강한 로비가 효과를 발휘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로 귀결됩니다.


제주 4·3

1947년부터 1950년 6·25 한국전쟁 직전까지 해방 공간 한국을 다룬 이 역사서를 집어든 것은 사실 최근 일부 극단적 보수세력이 이견을 제기한 제주 4·3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하는 이유가 컸습니다. 학창 시절 배운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교과서는 짧게 서술하고 지나갔습니다. 많은 양의 지식을 주입해야 하는 입시 교육의 문제기도 하겠지만, 그 당시에도 4·3 사건에 대해서는 진영 간 이견이 없지 않아 구체적인 서술은 피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책 역시 강준만 교수의 정치관, 역사관에 의해 4·3 사건이 서술됐지만, 적어도 그 팩트 하나하나를 확인한다는 데에는 읽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다른 사건을 서술할 때는 비교적 제3자 입장에서 간결하게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는데 비해 제주 4·3 사건만큼은 피해자들의 편에서 그들이 겪은 고통을 격정적으로 서술합니다.


4·3 사건 기간 당시 30만 명의 제주 인구 중 10% 이상이 희생됐다고 합니다. 숫자만도 충격적이지만 그 기간 제주에서 표출된 집단 광기는 더 충격적입니다. 주로 우리 토벌대에 이뤄졌다고 하는 양민들에 대한 폭력은 히틀러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말 태우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그 위에 태워 빙빙 돌게 한 것이죠.

'빰 때리기'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때리도록 한 것입니다.


"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중략)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할아버지 따귀 갈겨봐

손자는 불응했다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세게 때려 이 새끼야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세게 때렸다

영감 손자 때려봐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중략)

빨갱이 할아버지가

빨갱이 손자를 치고

빨갱이 손자가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이게 바로 빨갱이 놀이다 봐라

그 뒤 총소리가 났다

할아버지 임차순과

손자 임경표

더 이상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후략)"


(지금은 성추문으로 인해 거론이 잘 되지 않는) 고은 시인의 '오라리'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오징어게임'보다 더 잔혹한 역사 속 비극이었습니다.


총살자 가족을 앞에 세워 놓고 자기 부모 형제가 총에 맞아 쓰러질 때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하거나, 연행자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남녀 모두 옷을 벗긴 후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다 총살한 일도 토벌대에 의해 이뤄졌다고 합니다.


저자는 4·3 사건의 발화 자체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중앙당과 합의 없이 독단적으로 진행한 무력 행동에 있었다고 짚습니다.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한 것이 그 시작이었죠.


하지만 당시 군경과 정치적 분위기는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다는 점도 저자는 지적합니다. 아직 한반도 남북에서 모두 공식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고, 남한에도 공산주의자들이 많았습니다. 경찰은 친일파 잔존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고 좌우 세력의 물리적 충돌 분위기에서 서북청년회 등 청년단체들이 '치안 활동'을 일부 맡고 있었습니다. 경찰에 쫓긴 좌익 청년들은 경비대(국군의 전신)에 입대하면서 경비대 내 좌익 세력이 꾀나 형성돼 있었습니다.


1947년 제주에서 발생한 파업엔 경찰도 동참했는데, 그 수가 제주 경찰의 20%나 됐다고 합니다. 상당 수의 경찰관이 파면됐고, 충원은 서북청년회 소속 단원들로 이뤄졌습니다. 저자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제주 4.3의 비극을 불러일으킨 씨앗이 되었다고 짚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현재 정치권과 극렬 지지자들이 보여주는 극심한 진영 갈등은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이어져 온 뿌리 깊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노태우정부부터 이명박정부까지(노무현 대통령 사망 전) 일정 기간이 대한민국사 전체로 보면 그나마 진영 갈등이 덜했던 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좌우 이념 갈등이 극심했던 해방 정국 한국을 보여주는 책 '한국 현대사 산책 2'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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