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로슬링 가족의 '팩트풀니스'
대중 변화주려 '공포' 통계 요구한 엘 고어
수렵·채집시대 거친 인류, 일반화·간극 등
세계를 오해하게 하는 10가지 본능 남아
제3세계 의료봉사 활동해 온 저자
"사실에 기초해서만 문제 해결 가능"
세계를 똑바로 이해할 생각의 틀 제시
2년간의 독서 중 단연 최고의 책
"두려움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200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TED 강연장 무대 뒤. 미국 대선 후보에서 환경운동가로 변신한 엘 고어 전 부통령이 이 책의 저자 고(故) 한스 로슬링에게 한 말입니다. 통계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자 의사인 저자에게 엘 고어는 기후변화를 어떻게 가르칠지를 논의하면서 저자에게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꾸준히 늘어날 경우 '최악의 상황'을 도표로 보여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두려움에 다급함이 더해지면 어리석고 극적인 결정을 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엘 고어가 기후변화의 '최악의 상황'을 대중에게 제시하고자 한 것은 말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일으킴으로써 즉각적인 행동에 나서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공포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행동을 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렵·채집 시대에 사자를 보고, 독사를 만나고, 높은 곳에 올랐을 때 두려움을 느끼고 이를 회피함으로써 생존 가능성을 높인 조상들의 후손입니다.
이런 인간의 본능을 환경운동가, 정치인, 언론, 마케터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 마지막 구매 기회다. 이번을 놓치면 이처럼 저렴한 가격에 3종 세트를 살 수 있는 기회는 다시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빠질 것이다' '지금이 저점이다. ㅇㅇ코인에 들어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두려움을 활용해 대중들의 행동 변화를 촉구하는 기법은 매일 활용됩니다.
하지만 두려움과 다급함은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저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자기 생애 가장 뼈아픈 기억을 끄집어냅니다. 저자가 아프리카 모잠비크의 나칼라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북쪽 해안 지역 멤바에서는 수백 명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수분 만에 다리가 완전히 마비되고, 간혹 실명까지 하는 증상을 보였습니다. 저자는 어떤 독성 물질에 의한 것인지, 어떤 전염병에 의한 것인지 그 원인에 대해 완전히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전염병이라면 당장 통행금지 조치를 해야 했죠.
결국 저자의 조언에 따라 나칼라 시장은 멤바와 나칼라를 왕복하는 버스의 통행을 금지시킵니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사고가 터집니다.
버스가 끊기자 나칼라 시장에 가야 했던 멤바의 여성 20여 명은, 어부들에게 요청해 작은 어선을 타고 나칼라로 가려 시도합니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태운 그 작은 어선은 운항 중 파도를 만나 뒤집혔고, 사람들은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멤바 지역에서 나타난 현상이 전염병이 아닌, 독성 물질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아픈 과거를 꺼내 들며 "두렵고, 시간에 쫓기고, 최악의 시나리오가 생각날 때면 인간은 정말로 멍청한 결정을 내리는 성향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건에 대해서는 철저한 데이터 분석을 통해 원인을 찾고 이를 통해 해결책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데, 우리의 '다급함 본능'은 이를 방해합니다.
저자인 한스 로스링은 젊은 시절 인도와 모잠비크에서 의료봉사를 했고, 이후에는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을 세계에 알리는 스타 통계학 연사로 활동했습니다. 어떻게 이 별개로 보이는 두 정체성을 함께 갖게 됐는지는, 앞에서 제시된 나칼라에서의 경험을 살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에 근거한 판단과 해법만이 실제 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제3세계 의료봉사를 하며 절절히 경험했고, 이를 사람들에게 알리며 전지구적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려 했던 것이죠.
그가 이 책에서 제시한 '사람들이 세계를 오해하는 이유'는 △간극 본능 △부정 본능 △직선 본능 △공포 본능 △크기 본능 △일반화 본능 △운명 본능 △단일 관점 본능 △비난 본능 △다급함 본능 등 10가지입니다. 이름을 통해 직관적으로 어떤 본능들인지 가늠하시겠지만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ㅇ간극본능
-간극본능은 모든 것을 서로 다른 두 집단, 나아가 상충하는 두 집단으로 나누고 둘 사이에 거대한 불평등의 틈을 상상하는 본능.
-대표사례: 세계를 가난한 나라(개발도상국)와 부유한 나라(선진국)로 구분해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을 구성.
-실상: 소득 수준에 따라 네 단계로 나누는 방법을 제안. 하루 평균 소득 △1단계(2달러 이하) △2단계(~8달러 이하) △3단계(~32달러 이하) △4단계(32달러 초과). 이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91%는 중간 소득 국가나 고소득 국가에 살며 그런대로 괜찮은 삶을 살고 있음.
-그래프를 본다면 평균이 아닌 표준분포도와 같은 분산 방식으로 봐야.
ㅇ부정 본능
-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주목하는 성향.
-대표사례: 2017년 기준 지난 20년간 세계 인구에서 극빈층 비율이 같거나 거의 2배로 늘었다고 생각함(설문조사 결과 93%)
-실상: 전 세계는 20년 전만 해도 전체 인구의 29%가 극빈층이었지만, 이제는 그 비율이 9%로 줄었음.
-부정본능의 세 가지 원인 △과거를 잘못 기억하는 것 △언론인과 활동가들이 사건을 선별적으로 보도하는 것 △상황이 나쁜데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말하면 냉정해 보이기 때문.
ㅇ직선 본능
-추세가 그래픽상 직선 방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추정.
-대표사례: 세계 인구가 1900년 15억 명에서 2017년 76억 명으로 증가했는데, 이 추세가 직선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오해.
-실상: 인구학자들은 2100년에는 세계 인구가 110억 명을 기록하고, 그 전후로 증가세가 줄 것으로 예측.
-연관된 두 점으로 직선을 이으려 하지 말고, 최소한 점 3개를 가지고 그것이 직선인지 아니면 2배 증가 곡선의 시작인지 등을 구별해야.
ㅇ공포 본능
-위험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즉각적으로 회피하려는 경향.
-대표사례: 1950년대 환경운동가들의 문제제기로 인해 여러 국가와 원조단체가 DDT 사용을 금지.
-실상: 세계보건기구(WHO)는 2006년 "DDT를 인간에게 '미약하게 해로운' 물질로 분류하며, 많은 상황에서 건강에 해로운 점보다 이로운 점이 많다"라고 보고. 모기가 창궐하는 난민촌에서 DDT는 목숨을 구하는 가장 빠르고 가장 값싼 방법일 경우가 많음.
-공포는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지만 위험하지는 않은 것에 주목하게 하고, 실제로 매우 위험한 것은 외면하도록 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ㅇ크기 본능
-어떤 숫자에 대해 비율을 왜곡해 사실을 실제보다 부풀리는 경향.
-대표 사례: 제3세계에서 처음 의료봉사를 간 의사들이 눈앞에 있는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쏟음.
-실상: 죽어가는 아이의 대다수가 병원에 와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는 병원이 아닌 생활 위생 인프라, 교육에 자원 쏟아야(세계적으로 아동 생존율 증가의 절반은 엄마들의 탈문맹에 따른 것).
-해당 분야 수치의 80%를 차지하는 것에 주목하고, 그 수를 총합으로 나누거나, 1인당 수치로 환산하는 등 다른 숫자와 비교해야.
ㅇ일반화 본능
-사람은 끊임없이 범주화하고 일반화하는 성향. 큰 문제는 소수를 가지고, 심지어 매우 드문 단 하나의 사례를 가지고 그것이 속한 범주 전체를 속단할 수 있다는 것.
-대표사례: 서구권의 여성용품 기업들은 4단계 국가(하루 소득 32달러 이상)에서 생리를 하는 여성 3억 명에만 매몰된 채 거기에서 새로운 욕구와 새로운 고객을 찾으려 함.
-실상: 2·3단계 국가(하루 소득 2~32달러)에서 생리를 하는 약 20억 명의 여성들은 하루 종일 갈지 않고 쓸 수 있는 값싼 패드를 원함. 여성용품 기업들은 이곳에서 새 시장을 발굴할 수 있음.
-사업 계획을 세우려면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미래의 고객을 찾아야.
-△내부의 차이점과 집단 간 유사점 찾아보기 △다수에 주의하기 △예외 사례에 주의하기 △나는 평범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하나의 집단을 다른 집단으로 일반화할 때 주의하기.
ㅇ운명 본능
-타고난 특성이 사람, 국가, 종교, 문화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생각. 그것은 늘 그 상태로 존재했고,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태도.
-대표사례: 현재 미국인 72%가 동성혼을 지지하는 것을 보고 미국은 원래 동성혼에 우호적인 국가라고 생각.
-실상: 미국은 1996년에는 27%만 동성혼을 지지했음.
-지식을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느린 변화'도 변화임을 인정해야.
ㅇ단일 관점 본능
-어떤 현상에 대해 단일한 원인, 단일한 해결책을 선호하는 성향.
-대표사례: 세월호 참사, 제주항공 무안공항 참사 등 대형 사고가 터지면 유병언, 국토교통부 등 단 한 명의 '범인'을 찾기에 분주.
-실상: 대부분의 문제는 여러 가지 시스템이 복합적으로 얽혀 발생.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은 없다. 내 생각과 맞지 않는 새로운 정보, 다른 분야의 새로운 정보에 호기심을 가져야.
ㅇ비난 본능
-왜 안 좋은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하고 단순한 이유를 찾으려는 태도.
-대표사례: 원가 이하로 유니세프에 약을 공급하는 스위스 제약사에 대해 '어떤 음흉한 방법이 있을 거라' 의심(저자의 사례).
-실상: 해당 스위스 제약사는 헝가리 원재료 납품사로부터 30일 외상을 받고, 유니세프는 그날부터 나흘 뒤 제품에 대한 대금을 지불. 스위스 제약사는 26일 동안 이자 수익을 얻는 구조.
-문제의 원인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 하나일 때는 흔치 않음. 대부분의 문제는 여러 원인이 얽힌 시스템에서 발생.
ㅇ다급함 본능
-두렵고, 시간에 쫓기고, 최악의 시나리오가 생각날 때면 멍청한 결정을 내리는 성향.
-대표사례: 환경운동가들은 '기후 난민'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 사람들의 환경보호 실천을 촉구.
-실상: 기후변화와 이주의 관계는 대단히 미약. 난민에 대한 두려움을 기후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꿔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 기반을 넓히려는 의도.
-데이터는 진실을 말하는 데 사용해야지, 행동을 촉구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됨.
저는 작년 1월부터 지금까지 2년째 주기적인 독서를 하고 있는데요. 69번째 책인 '팩트풀니스'는 그간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최고의 책입니다. 세계 전체를 정확하게 보고 판단하는 생각의 틀을 제시한다는 점, 이를 위한 논리 전개가 그의 의료봉사 경험 봉사 등에서 나온 구체적이고도 대표성을 갖는 사례들을 근거로 한다는 점, 인류 전체의 일종의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감성주의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이미 이 책에 대해 많이 얘기했지만, 이 책만큼은 정말 꼭 직접 읽기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한마디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사실에 근거해 바라보면 세계는 생각만큼 그렇게 나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이 책은 한스 로슬링의 분석과 원고를 토대로 그의 아들 올라 로슬링과 며느리 안나 로슬린 뢴룬드가 엮어 펴냈습니다.
**책 앞부분에 제시된 13개 퀴즈는 이 책의 핵심 포인트이나, 자칫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되도록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