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데이

3월 14일

by 란님


새벽 4시에 이유 없이 눈을 떴다. 바깥이 조용한데 침대 위에 신랑이 없다. 아무래도 또 컴퓨터 방에서 잠이 든 모양이다. 감기기운이 있다고 느낀 후 아이들에게 옮지 않게 4일째 따로 자고 있다. 약도 며칠 먹었고 증상도 나아진 것 같으니 불필요한 조치인 듯하여 신랑을 데리러 간다. 잠에 취해 정신 못 차리는 사람을 깨우자니 미안하긴 하지만, 침대에 누워서 편하게 자는 게 신랑의 회복을 위해서도 더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다. 힘이 부족하여 들어다 옮겨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신랑까지 옮겨놓고 나니 잠이 완전히 깨버렸다. 누워도 쉬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물 한 잔 마시고 노트북을 열었다. 브런치의 글을 백업해 두고 새 글을 작성하다가 일기까지 쓴다. 어느덧 여명이 밝아 오며 저 멀리 설악산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산간지역에는 어젯밤 눈이 내린 걸까, 하얀 눈으로 뒤덮인 모습이 아주 멋져 보인다. 새하얀 설경으로 장식하는 화이트데이 아침이다. 글을 몇 자 적지도 못했는데 막내가 일어나서 엄마를 찾는다. 더 재울 겸 안아 들고 누웠다가 엄마만 잠들었다.

"엄마, 산이 하얘요! 이리 와봐요!"

엄마에게 멋진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둘째의 외침에 다시 눈을 떴다. 다른 아이들은 자기들만 보고 말았는데, 예쁜 걸 엄마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달콤하다.


양치하고 시리얼을 먹고, 각자 놀다가 12시 즈음 점심을 차린다. 양파를 꺼내어 다듬고, 어제 사둔 소고기와 함께 구웠다. 아이용 식판에다 밥, 고기, 양파, 시금치나물을 담아 내주었는데 아이들 반응이 시원치 않다. 맛이 없나 싶어 먹어보았는데 내 입에는 맛있다. 아빠는 같은 메뉴에 김치만 더해서 먹고, 나는 아이들이 남긴 걸 혼자 다 먹었다. 치워놓고 디저트로 마카다미아넛을 주었더니 그건 아주 잘 먹는다. 달달하고 고소한 것만 좋아하면 어쩌자는 거지 조금 걱정이 된다.


오늘은 동네에서 <한글용사 아이야> 공연을 보는 날이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 모르는 캐릭터이지만 요맘때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고도 하고, EBS에서 방영하는 프로그램의 주인공이라고 하니 교육적인 내용일 것 같아 예매해 두었다. 이름조차 "한글"용사 아닌가. 어릴 때 보던 파워레인저의 한글 학습 버전 아닐까 기대해 본다.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완료한 후 아빠를 기다린다. 일찍 나가서 낮잠 한숨 재우면 좋겠는데, 아빠의 볼일은 쉬이 끝나지 않는다. 공연 50분 전에야 차에 탈 수 있었다. 공연장까지는 10분도 안 걸리니, 카페 드라이브스루에 들러 간식을 샀다. 아이들은 동결건조 딸기, 나는 슈크림 라테를 먹는다. 신랑은 우리가 공연을 볼 동안 카페에 가있으면 되니 주문하지 않았다. 30분 후에 발급되는 커피 60프로 할인 쿠폰을 활용할 계산도 했고 말이다.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사이 셋째가 잠들었기에 조금 더 자라고 차에서 20분 정도 대기하다 공연장으로 입장한다. 포토존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자리를 잡으니 3분 뒤 공연이 시작된다. 맨 앞줄로 예약했더니 뒤에 앉은 꼬마들이 신경 쓰여 바로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60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숙이고 있었더니 허리와 골반이 아프다. 그래도 이런 작은 배려가 세상을 따뜻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공연자 분들은 다들 태권도 유단자에 비보이 출신인지 중간중간 멋진 퍼포먼스를 선보여주셔서, 아이들도 부모들도 감탄하며 보았다. 어린이 공연답게 아이들의 참여와 공감을 유도하는 것에도 능숙하셨고, 공연이 끝난 후 객석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아이들과 하이파이브해 주시는 것도 감사했다. 우리 조카는 '번개맨'을 좋아하며 자랐는데, 이제 한글용사 아이야인가 보다. 교육적인 프로그램을 재밌게 만들어주는 EBS, 응원할게요!

저녁으로 돈가스를 먹었는데, 속에서 받아주지를 않는다. 초밥집에 가서 우리는 초밥 먹고 애들은 돈가스를 먹이면 될 것을, 굳이 경양식 돈가스를 고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지난 월요일과 수요일에도 돈가스를 먹었는데, 토요일까지 먹었으니 벌써 3번째이다. 이번 주에는 유독 외식할 때마다 돈가스 집에 오게 되었다. 속이 느끼하고 더부룩하다. 아이들 의견을 존중해 줄 필요는 있지만, 경험치가 낮은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선택하게 하는 것은 좋지 않은 방법이라고 본다(메뉴를 고르라고 하면 매번 돈가스, 파스타, 탕수육, 햄버거 중 하나가 나온다). 다음 주 목표는 돈가스 안 먹기로 정했다. 강력하게 거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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