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6일
아이들과 에그박사 만화책을 읽다 알았는데, 북극에 사는 바다표범은 자면서도 30초에 한 번씩 깨어 주위에 적이 없는지 확인한다고 한다. 현대를 사는 인간은 포식자의 공격을 걱정하지 않는 최상위 포식자이지만, 아이를 낳은 후로는 나도 얕게 자며 자주 깨게 되었다.
어젯밤엔 처리할 일이 있어 1시가 넘은 시각에 잠이 들었는데, 잠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가 흐느끼는 소리에 깨어났다. 아마도 다리를 쭉 뻗다가 근육이 뭉친 모양이다. 어릴 적 그 통증으로 괴로웠던 기억이 있어 아이가 힘들어하는 걸 발견하면 그냥 두지 않고 도와준다. 고통 완화를 위해 스트레칭도 해주고 살살 주물러 준다. 어젯밤에도 한참 주무르다 잠들고, 우는 소리에 다시 깨어나 주무르다 잠들고, 또 울기에 안아 들고 발을 만져주다 잠들었다. 동틀 녘에는 6시 알람의 진동소리에 일어나 해야 할 일을 처리하고 다시 잠들었다가, 7시 30분 알람에 맞추어 평소보다 30분 일찍 일어났다. 요약하자면, 잠을 제대로 못 잤단 이야기이다. 아침시간이 여유로웠으면 해서 일찍 일어났지만 여전히 빠듯하고 정신없다. 모닝빵 계란 샌드위치를 만든 후 같이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시간만 벌었다.
아이들이 등원한 후 아침 먹은 걸 정리해 놓고 짐을 챙겨 집을 나선다. 10시부터 시작하는 바이올린 수업장소에 30분 일찍 도착하여 자리를 세팅해 두고 바이올린 연습을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내가 막내그룹에 속하는지라 일찍 오면 어르신 선배님들을 위한 자리를 미리 준비해 둔다. 의자와 보면대를 옮기는 게 생각보다 무겁기 때문이다. 끼잉끼잉 지잉지잉 각자 연습에 몰두하는 강의실이 소란스럽다. 다들 자기 소리에 집중하며 여러 악보가 뒤섞이니, 나의 서툰 연주실력도 묻힐 것 같아 자신감을 갖고 연주해 본다. 합주 때는 아직 속도를 못 따라가기에 청음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악보를 읽는 것에 서툴기에 연주를 들으며 음을 파악하는 편이다. 수업이 끝나고 자리를 정리할 때도 막내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배려를 당연시하면 돕기 싫어질 테지만, 선배님들도 매번 고마워하시고 여러 사람이 같이 정리하는 분위기라 기꺼이 나서게 된다. 집에 가면 어차피 연습할 시간이 없기에 바이올린은 강의실 한구석에 놔두고 왔는데, 이 또한 선배님들께 배운 지혜다.
홀홀단신 가벼운 마음으로 버스에 탔는데 휴대폰의 교통카드가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유심카드를 바꾼 때문인 것 같다. 한구석으로 비켜 선 채 서둘러 교통카드를 등록하여 태그를 마치니 벌써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 원래도 4 정거장 밖에 안 되는 데다 기사님이 질주까지 해주셔서 더 빨리 도착했다. 집안을 간단하게 정리한 후 일을 마친 신랑이랑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추천받아 기억해 두었던 국숫집에 가서 잔치국수와 고기만두를 먹은 후에, 집 앞 카페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를 정기적으로 해야 공통의 목표를 함께 추진해 나갈 수 있다. 우리 집을 잘 이끌어 가려면 서로 의견을 계속 나누어야 하는데, 그동안 회의가 너무 적었다. 덕분에 작년 봄에 세운 목표들을 아직도 우리의 목표라고 되풀이해 이야기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작년의 목표를 부부 톡방 공지사항에서 발견했다). 신랑은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피하려다 보니 자신의 활동에 제약이 너무 많아졌다며 불만을 토로했는데, 나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다. 신랑이 말한 것들은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아니다. 아파트 헬스장 가기, 예전에 뛰던 팀에서 야구 계속하기, 서울 친구들 만나기 등은 오히려 내가 권장하고 장려하는 사항들이다. 내가 진정 싫어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다시 되짚어주며 신경 써줄 거면 그것들을 삼가 달라고 요청했다. 4가지인데, 그 안에는 담배도 있다. 부디 내년 봄에는 이 의미 없는 도돌이표 대화를 반복하고 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대화 좀 자주 하자. 아주 작은 무언가라도, 나를 위한 노력을 해주었으면 해, 여보.'
아이들은 하원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주머니에 있던 풍선을 꺼내어 불기 시작한다. 아침에 풍선을 갖고 놀다가 주머니에 담아 갔는데, 유치원에서는 개인 장난감을 못 갖고 노니 이제야 꺼내나 보다. 저녁시간 내내 '풍선 불어 방귀소리 만들기'를 반복하다가 이내는 풍선을 묶어달라고 하여 공놀이를 하며 논다. 이렇게 작고 가벼운 풍선만 주어도, 풍선을 불어주고 묶어주는 것만으로도 좋아해 주는 아이들이 너무 고맙다. 아이들과 지내다 보면, 행복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깨닫는다.
저녁을 차리고 있는 내게 갑자기 신랑이 포항에 가야 한다는 말을 한다. 무척이나 황당하지만,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티 내지 않았다. 이유가 있겠지 싶어 그냥 보내긴 했지만 생각이 많아진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자기 저녁만 먹고 가버린 신랑 덕에 나의 저녁 일정이 무척 바빠졌다. 원래는 신랑이 아이들을 씻기는 동안 내가 저녁 먹은 걸 치우는데, 오늘은 내가 전부 다 해야 한다. 낮에도 회의하느라 집안일을 별로 못했는데 난감하다. 그나마 내일이 화요일이라는 게 다행이다. 화요일에는 일정이 없으니 집안일에 열중할 수 있다.
저녁 먹은 건 설거지통에 담가만 놓고, 이왕 아이들을 씻기게 된 김에 헤어스타일까지 다듬어주기로 한다. 어린이 미용실처럼, 태블릿에 좋아하는 영상을 틀어준 다음 집중하여 빠르게 다듬는다. 6살이 된 지금까지 매번 내가 직접 다듬어 주었는데, 가끔은 망칠 때도 있지만 아직 외모에 큰 관심이 없을 때라 무마 가능했다(사실 내 눈에는 어찌하고 있어도 항상 예쁘다). 아이들 셋의 머리를 다듬고 나니 욕실 바닥에 머리카락이 수북이 쌓였다. 샤워기와 거름망의 힘을 빌어 치워 놓고 아이들을 씻긴 다음 나도 후딱 씻는다. 머리를 말리고 에그박사 14권을 읽어주고 다리 마사지를 해준 다음 눕히니, 고맙게도 재빨리 꿈나라로 이동해 주었다.
엄마나 아빠가 혼자 육아할 때는 아이들이 좀 더 차분하고 빠릿해진다. 눈치를 보는 것이니 미안한 마음이지만 협조해 주어 고맙기도 하다. 아이들이 잠든 다음에는 일어나 빨래를 돌렸다. 내일 이불 빨래를 하려면 오늘 생활빨래를 마무리해두어야 한다. 빨래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가계부 작성을 시작했다. 신랑이 돌아오면 생활비에서 무엇을 줄이고 무엇은 양보할 수 없는지, 씀씀이에 대한 논의도 함께 진행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