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3월 18일

by 란님


아침 7시 20분에 눈을 뜨니 반짝이는 두 눈이 나를 포착하는 느낌이 든다. 셋째가 밝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우연히 눈을 떴을 뿐, 지금 일어날 계획은 아니었는데 일어나야겠구나를 직감한다. 어쩌면 아이의 시선을 느끼고 깬 걸지도 모른다.

"엄마, 아빠는 어디에 있어?"

"그러게? 밖에 있나? 엄마랑 찾아볼까?"

현관과 다른 방들에도 신랑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환하게 켜진 거실 불만이 식탁 위에 놓인 어젯밤 새로 뜯은 우유를 비추고 있다.

"얘들아, 어제 자러 들어오기 전에 불 껐다고 하지 않았어? 우유도 안 넣어놨네?"

누구도 대답은 하지 않고 말똥말똥 나를 쳐다보고만 있다.

'무슨 소리야, 엄마? 그건 엄마가 해야지.' 이런 느낌이다. 맞다, 너네 6살이지. 확인하지 않고 잔 나의 불찰이다.


신랑은 어디 간 건가 궁금하여 휴대폰을 열어보니 상황 파악이 된다. 함께한 친구들이 직장인이라 늦게 시작된 골프가 11시 반에야 마무리되었고, 포항에서 야식을 먹고 올라오는 길에 졸려 휴게소에다 차를 세워둔 채 잠들었단다. 예전에는 신랑이 아무 데나 차를 세우고 자는 게 귀여웠다. 엉뚱한 모습이 웃겼고 스스럼없는 모습이 천진해 보였다. 하지만 이젠 좋아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위험하기도 하고, 큰 차도 아닌 승용차에서 쭈그리고 자는 것 자체가 건강에 너무 안 좋을 것 같다. 혈전의 위험도 증가하고 그렇게 몸을 막 다루면 늙어서 고생할 게 뻔하기에 걱정이 된다. 나 스스로가 출산 후 몸이 약해지면서 건강은 영원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날도 추운데, 춥게 자면 몸 축나는데. 아, 히터를 틀지 않고는 자기 힘들었을 텐데 요즘 같은 고유가시대에 기름 아까운 줄을 모르고. 내 머릿속 잔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지만, 그냥 빨리 오라고만 말하도록 노력한다.


등원 후 간단한 빨래와 식세기 정리,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으니 신랑이 들어온다. 가장 큰 것은 반가운 마음이지만, 인사도 안 하고 방으로 가버리는 모습이 미워서 질책을 쏟아냈다. 부딪히고 싶지 않았는지, 신랑은 또 밖으로 나가버린다. 기다렸다 이야기를 하고 갈까 고민했지만, 피곤할 텐데 놔두자 싶어 바이올린 수업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이들 등원 후 40분을 정리했는데도 집은 여전히 엉망이라 한숨이 나온다.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니 무리하지 않고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중 갑자기 궁금해진다. 청소 서비스 요금이 3시간에 5만 원 정도인데, 40분 동안 청소를 하고 택시(6천 원)를 타는 게 가계에 이득 맞나? 신랑과 메시지를 주고받다 알게 되었는데, 들어오는 길에 나를 태워주고 가려고 했는데 통화 연결이 안 되었다고 한다. 집안일이 바빠 진동소리를 못 들었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바이올린 시간, 자리에 앉아 연습을 열심히 했음에도 선생님과 독대할 타이밍이 되자 연주가 엉망으로 나온다. 내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빨개진 것을 선생님은 느끼셨으리라. 실력이 부족하긴 하지만 좌절하지는 않는다. 나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이 재밌다. 오늘 수업은 이번 학기 4회 차 수업이다. 지난 학기에는 애들 방학중이라 4회 차까지 출석을 한 번도 못했고, 활 잡는 방법조차 몰랐다. 이제는 느리긴 해도 음계도 알고, 지난 학기에 비해 현을 중복되게 긁는 횟수도 확연히 적어졌다. 무엇보다 접근할 엄두도 못 내던 고음자리에서 놀고 있지 않은가. 선생님의 조언도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느낌이다. 여전히 기초적인 것을 알려주시지만, 자세를 교정해 주시고 악보에 맞춰 연주하도록 지도하시는 등 지난 학기보다는 고차원적인 것을 알려주려 하시는 느낌이다. 연습할 시간을 못 내는 것은 아쉽지만, 이번 학기가 끝날 즈음의 나는 나아져 있을 것이 분명하다.


지난주에 같이 걷던 동료와 오늘도 함께 걸으며 밥을 먹고 차도 마셨다. 둘이서만 만나면 여럿이 만날 때와는 다른 느낌이 있다. 대화도 더 깊이 있게 할 수 있고 말이다. 다만 시간을 너무 많이 뺏는가 싶은 생각에 매주 이러지는 않는 게 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람 사이의 적당한 간격이라는 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 정답이겠지.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알고 지켜야 한다.


집까지 걸어가면 도착하자마자 다시 나와야 할 것 같은 애매한 시간이라, 카페에 앉아 글을 쓰면서 신랑을 기다리기로 했다. 3시 40분까지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하는 걸 알고 있으니, 알아서 아이들을 데리고 오겠거니 생각은 하지만 통화 연결이 안 되는 게 불안하다. 3시 30분이 넘어서야 통화가 된 신랑은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고 한다. 어서 일어나 아이들을 데리고 내게 와달라고 했다. 아빠와 엄마가 쌍으로 늦장 부리는 바람에 아이들은 수업시간에 조금 늦어버렸다. 대기 및 출석이 없이 바로 시작하니 아이들이 더 빠르게 빠져드는 것은 장점이지만, 늦는 것은 선생님께 실례이니 시간 맞춰서 다니도록 가르치리라 다짐해 본다.


수업에 아이를 데리고 온 지인들과 앉아서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수업 종료 시각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다 지나가버렸다. "화가 나는 것은 기대가 크기 때문"이라는 지인의 말이 마음에 남는다. 우리들은 각각 자기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각자의 저녁일상으로 돌아갔다.


수업이 끝나면 외식 후 귀가하여 씻고 자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는데, 아이들이 아빠의 야구 연습에 따라가겠다고 한다. 거의 이틀 만에 만난 아빠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 걸까. 셋째는 야구장에 안 가고 싶다고 하지만, 보호자가 한 명이니 나누어 이동할 수는 없다. 팀 연습에는 오늘 처음 가본다고 하니 신랑이 오늘 인사만 하고 일찍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기도 간다는 둘째를 달래면서 '1시간만 하고 온다'던 아빠는, 1시간 10분 뒤에 나타나더니 '1시간 더 하고 오겠다'라고 말을 바꾼다. 무슨 마음인지 이해는 하지만 속상하다. 저녁 8시 10분에 나오면 웬만한 식당은 다 마감한 상태일 것이다. 김밥이라도 주문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늦게 도착할 경우 아빠가 돌아올 때가 되어서야 올 것이다. 그럴 바에는 그냥 식당에 가서 다 같이 먹는 게 낫다.


신랑이 돌아오니 8시 20분이었다. 2시간이 넘는 동안 아이들은 베베핀 조금, 뽀로로 조금, 티니핑 조금을 보고, 잠시 쉬는 동안 별도 찾고 저 멀리 지나가는 차들의 색깔 맞히기 놀이를 하다가, 다시 뽀로로 한글노래 영상을 보면서 아빠를 기다리며 수다를 떨었다. 아이들이 영상을 보는 동안에는 나도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어 좋았지만, 엄마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평소 같으면 잠자리에 들기 직전 책을 읽는 시간이다. 그런데 아직 밥도 못 먹고 차에 앉아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니. 다음부터는 평일 저녁 연습에 절대로 안 따라오리라. 아이들 끼니를 때맞춰 챙겨 먹여야 한다는 생각은 뒷전이고 자기 할 일에만 바쁜 신랑이 미워진다. 애당초 평일 저녁에 외출하는 스케줄을 당일에야 통보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며칠 전부터 오늘은 샤브샤브를 먹기로 되어 예정되어 있었지만, 이미 주문마감이거나 영업종료인 상태였다. 유일하게 영업시간이 50분 남았다던 가게는 2시간을 기준으로 인원수대로 이용요금을 부과하는 뷔페식 식당이었다. 결국 집 근처 족발집으로 가서 맛있는 식사를 얼른 마치고 귀가한 후, 엄마 아빠가 협심하여 샤워만 얼른 시키고 에그박사 에피소드도 2개만 읽고 다리 마사지를 해 재웠다.


내일 하루 종일 바쁠 예정인 엄마는 다시 일어나 집안일을 시작한다. 설거지와 빨래를 돌려놓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청소기 없는 물티슈 청소를 시작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후에는, 목욕을 마친 신랑과 대화를 시도하였지만, 신랑은 대화하고 싶지 않은지 자꾸만 나를 피한다. 이해한다. 불편한 상황은 피하고 싶은 것이 당연한 마음이다. 나도 역시 그렇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몇 개나 있을까. 기약 없는 회피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상대방을 괴롭게 만드는 일인지 정녕 모르는 걸까. 알면서 그러는 거라면 더욱 희망이 없다.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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