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잼

3월 28일

by 란님


오늘은 유아차런에 참가하는 날이다. 마라톤을 즐기지는 않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는 걷기 대회라니 재미있을 것 같았다. 어린아이가 있어야만 참가 가능한 행사, 이런 이벤트가 많아져야 한다고 본다. 아이가 있는 게 특권으로 느껴지는 기회 말이다. 차별과 특권, 둘 다 다르게 대하는 것이지만 안 좋게 느껴지면 차별이고 좋게 다가오면 특권이다. 아이가 생기면 차별은 아주 많이 느껴지는 반면 특권은 별로 없고 작은 느낌이다. 아이를 가진 것이 특권으로 느껴질 일이 많아야 출산하고 싶은 마음도 커지지 않을까.


유아차런은 7시 45분까지 오기를 권장한다. 프로그램을 보니 이런저런 체험 구경하다가 내빈 소개 및 말씀을 듣고 8시 30분에 출발한다고 되어있다. 골프 갈 때만 빼고 아침에 움직이는 걸 힘들어하는 신랑을 위해 최대한 재워주다 출발시각에 맞추어 가기로 마음먹었다. 8시가 되기 조금 전에 눈을 떠서 아이들에게 찐 고구마를 먹이고, 옷을 갈아입힌 후 신랑을 깨웠다.


신랑은 또 눈을 뜨자마자 담배를 피우러 나간다. 얼른 준비하고 나가서 피면 시간이 훨씬 절약될 텐데 "우리의 스케줄"에 대한 고려가 없다. 신랑이 돌아왔을 때 시계를 보니 8시 40분이 이미 넘었다. 이러다 행사 참가도 못할까 걱정이 되어 서둘러 짐을 챙겨 나갔다.

우리 집에서 가장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사람이 준비는 가장 느리다. 조금 더 자라고 막바지에 깨우는 등 지나치게 배려해 주는 것이 오히려 신랑을 무능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자기 약속에 나갈 때는 시간 맞춰 잘 일어나서 다니니 말이다.


차에 짐을 실어두고 체크아웃까지 마친 후 허둥지둥 나가보니 광장은 한산하고 파이널콜이 나오고 있다. 사회자가 "거북이반(걸어가는 팀) 여러분, 지금 출발 안 하시면 토끼반(뛰어가는 팀)처럼 뛰셔야 할 수도 있어요!"라고 외치고 있다. 천천히 출발하는 팀 사이에 슬그머니 껴서 여유롭게 출발해 본다. 자주 다니던 길을 따라 차도 위를 걸었다. 광화문광장이야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곳이고 촛불시위 때도 밟아 보았지만, 남대문을 지나 서대문역, 공덕역,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공원까지 걸어가 보는 건 처음이다. 서울에 살 때 신랑이 야구하는 날이면 매번 지나가던 코스, 생각보다 차가 별로 막히지 않고 잘 흘러가 우리가 좋아하던 그 길을 아이들과 함께 걸어간다.


신랑은 군대도 운전병으로 다녀와서 그런지 많이 걸어본 경험이 별로 없다. 걷는 걸 무척 싫어하여 이태리 여행을 갔을 때도 날마다 발이 아프다며 힘들어했다. 매일매일 달래고 주물러가며 여행을 다녔던 기억이 선명하여, 8km를 어떻게 걸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가까웠다. 아이를 낳은 후로 품이 넉넉한 신발만 신고 다니다가 오랜만에 발에 착 감기는 신발을 신었더니 발가락이 좀 아프긴 했지만 말이다.


도착해서 메달과 구디백을 받아 간식을 먹으며 인증숏을 찍고, 나만의 메달 만들기 체험을 하고 연세우유에서 나누어주는 우유도 받은 다음 체험장을 나왔다. 벽면에 이름을 띄워주는 포토존이 백미이긴 했으나 줄이 너무 길어 포기하고 나왔다. 지나가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수집해 보니 다회차 참여한 가족이 많은 것 같았지만 우리는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다. 크게 의미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택시를 타면 2대에 나누어 타야 하고 유모차도 접어야 하니,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이층 버스를 타고 광화문으로 돌아왔다. 숙소 건물에 위치한 식당에서 자장면과 탕수육을 먹고, 근처 어린이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식당에 들어와서야 버스에 휴대폰(아이들 영상 보여주기용 세컨드폰)을 놓고 내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를 못이겨 혼자 씩씩대는 신랑의 모습을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너무나 속상한 일이 맞다. 하지만 자기가 떨어트린 건데, '괜히 이런 곳에 와서 휴대폰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라고 생각하며 또 나를 원망하는 게 보여, 그걸 티내는 게 너무 못나 보인다. 다행히 휴대폰을 발견한 기사님이 차고지에 맡겨주신다고 하였고, 퀵서비스를 이용해 받기로 했다. 신랑은 이래저래 바쁘다길래 놔두고, 우리끼리 어린이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택시를 타려고 유모차를 놓고 왔는데 택시가 안 잡혀서 그냥 걸어갔다. 박물관에서 논 다음 여태 한 번도 못 가본 야외놀이터까지 들렀다 나오니 다리가 너무 아프다. 버스는 9분 뒤에 온다고 하는데 정류장에는 자리가 없고, 택시는 안 잡히기에 그냥 걸어가기로 결심하고 다시 또 걸었다.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멀게 느껴진다. 첫째에게는 사탕을 하나 쥐어주고 셋째는 손을 꼭 잡아준 다음, 다리가 아프다고 우는 둘째를 안았다 업었다 달래 가며 숙소 근처까지 돌아왔다. 200m 남짓 남았지만 더 이상은 무리인 것 같아 카페에서 컵 아이스크림을 구입하여 하나씩 쥐어주며 차에 가서 먹자고 했더니 그제야 군말 없이 걷는다. 아빠와 합류하여 차 안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낮잠을 잤다.


푹 자다 눈을 떠보니 언니(애들 이모)네 집 주차장이다. 학원 연주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첫째 조카와 언니를 만나 함께 귀가했다. 버터떡은 어떤 맛인가 궁금하던 차라 언니네로 주문하여 나눠먹었다. 겉은 딱딱한데 속은 쫀득쫀득 부드러운 찹쌀빵이다. 예전에 즐겨 먹던 깨찰빵이 작고 부드럽게 서양식으로 진화한 느낌이랄까.


점심에 먹고 남았다는 피자도 집어먹고, 앉아서 수다를 떨다 첫째 조카의 요청으로 닌텐도 게임을 시작했다. 사랑하는 조카의 요청이라 함께 즐겁게 하고 싶었으나, 너무너무 재미가 없다. 시간은 또 왜 이리 많이 잡아먹는지 모르겠다. 장면 전환이 많은데 그때마다 설명도 너무 길고, 컴퓨터가 플레이하는 것까지 봐줘야 하다니. 초보인 날 위해 조카가 너무 쉬운 버전을 켜주었기 때문일까. 우리 때는 게임보이가 있었지만, 그때도 나는 재미가 없었다. 대학생 시절에는 플스방이 유행이었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음악과 춤이 결합된 형태인 DDR, 펌프 말고는 스스로 찾아가서 오락을 해본 적도 없다. 오락이나 게임을 좋아하는 세포 자체가 없는 듯하다.


엄마와 언니가 차려주신 저녁을 먹고, 아이들 목욕을 마무리해 준 후 나도 씻고 책을 읽어주었다. 우리 집에서는 세 사람이 계속 나를 찾는다. 언니네에 오니 나를 찾는 사람이 세 명 더 생겼다(막내 조카는 아직 안 찾는다). 왜 이렇게 다들 나만 찾는지 모르겠다, 행복하게시리. 마사지 한 번 못 받고 오후 내내 들들 볶이긴 했지만 이런 게 행복이지. 잘 때도 이모와 같이 자겠다고 오는 조카들이 참 사랑스럽다.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 실컷 즐기리라.

매거진의 이전글여행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