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안식처
외할머니댁은 작은 시골동네에 위치해 있었다. 자식들을 분가시킨 후 기존에 사시던 곳을 큰아들에게 물려주고 단출하게 살기 위해 이사하셨다고 한다. 대다수가 노인이던 동네 주민들은 서로를 알았고, 매일매일이 평화로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동네였다.
차도에서 골목 안으로 조금만 들어오면 정면에 보이던 녹색 대문은 키가 큰 성인 남성이 까치발을 해야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의 담을 끼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보이는 아담한 마당에는 석류나무와 감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와 짙은 갈색 흙으로 덮인 넉넉한 텃밭이 있었고, 텃밭 너머로는 창고와 화장실 공간이 있었다. 옛날집이라 화장실이 외부에 있었지만 나는 그곳을 이용한 기억이 많지 않다. 방 안에 둔 요강에서 볼일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호강에 겨운 생활이었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노란빛 전구를 켜야만 구경할 수 있던 창고 안에는 각종 추억이 가득하였는데, 나와 관련된 추억은 하나도 없어 쓸쓸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외할머니는 엄마와 이모, 외삼촌들의 어머니라 당연한 일일진대 당시에는 섭섭하여 그곳에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나인데 나를 위한 공간은 없는 게 속상했던 것 같다. 창고 안에 흥미로운 물건이 얼마나 많았을지를 생각하면 무척 아쉬운 일이다. 어쩌면 엄마가 보여주시지 않았던 엄마의 옛 사진, 특히 아빠와의 사진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인데 말이다. 굳이 들어가서 뒤져보지 않아도, 내가 심심해할까 걱정되셨는지 사촌오빠의 드래곤볼 만화책은 꺼내다 주셨다. 밥 안 먹어도 되는 알약, 자동차로 변하는 캡슐 등을 보며 부러워하고, 구슬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다닌 기억이 난다.
가끔 외할머니 댁에 가있을 때면(나는 꽤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 것 같은데 엄마는 몇 번 안 갔다고 말씀하신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낮시간 내내 거실 마룻바닥에 앉아 잡다한 일을 했다. 주로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보거나 글자를 끄적이는 일이었다. 마당 평상에 누워 구름을 쳐다보는 것도 좋아했는데,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다 보니 하늘이 아주 잘 보였다. 해 질 녘에는 뒷산 방향으로 날아가는 새 무리를 보며 어떤 곳으로 가는 걸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아이들이 없는 동네이다 보니 같이 놀 사람이 없어 처마 기둥 양쪽에다 고무줄을 묶어놓고 혼자 고무줄 뛰기도 해 보았고, 가끔 이웃집에 손주가 놀러 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골목에 나가 서성이다 말을 건 기억도 난다.
주일 성당에 가거나 장날 혹은 관공서 방문으로 읍내에 나가는 날이면 할머니 손을 잡고 쫄래쫄래 따라갔다. 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갈치를 사주실 때면 커다랗게 빛나는 은빛 모습에 설레기도 했다. 좀 크고 나서는 읍내까지 혼자 걸어가 문구점을 구경하고 편지지를 사 와서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할머니는 큰딸(큰이모)과 함께 사셨는데, 이모에게는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들이 있었다. 사촌오빠는 장성하여 독립하고 없었기에 오빠 방이 나의 놀이방이 되기도 했다. 이모는 방에서 공책과 종이, 필기구를 꺼내어 제공해 주셨다. 다른 방과 공용공간에는 없던 에어컨이 그 방 창문에는 달려있어, 오빠가 얼마나 사랑받고 자랐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그 시절에는 귀하던 컴퓨터도 있었다). 이모는 종종 오빠가 받은 상장이나 트로피를 꺼내와 자랑하시며 그리운 눈빛을 보이기도 하셨다. 이모에게 딸이 없었기에 내가 조금 더 이쁨 받은 거라 생각하면 다행이지만, 이모의 쓸쓸함에 감정이입이 되어 괜스레 사촌오빠가 미워지기도 했다.
할머니는 저녁을 먹고 나면 후식으로 무를 깎아 주셨다. 소화에 도움이 된다며 생무를 잘라 주시면 다 같이 그걸 씹어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봤는데, 아삭하고 시원하며 뒷맛이 깔끔하여 나도 꽤 즐겼던 것 같다. 가끔은 손주를 위해 직접 과자도 만들어주셨는데 그 레시피를 받아두지 않는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나는 그 맛이 그립다. 몇 년 전 우연히 먹어 본 개성약과가 비슷한 맛을 내는 걸 알고 여러 번 사 먹었지만, 끈적하면서도 담백하던 감칠맛을 살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할머니는 매일 주무시기 전 방에 걸어둔 십자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식들을 위한 기도를 하셨다. 나에게도 옆에 앉아 눈 감을 것을 명하셨지만, 나는 기도하시는 할머니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기도를 듣다 보면 할머니의 자식들에게 샘이 나기도 했지만, 후반부 마무리는 늘 우리 엄마와 (나를 포함한) 엄마 가족을 위한 기도였기에 마음이 풀렸다. 할머니가 날마다 간절히 바라신 것처럼 할머니의 자식들(중 남은 이들과 그 후손들)이 건강하고 무탈하길 나도 기원한다.
엄마가 할머니께 전화하시는 시간대도 주로 저녁시간이었다. 자기 전 막내딸의 전화가 오면 할머니는 통화를 길게 이어가지 않고 얼른 끊으셨지만(전화요금이 많이 비싸던 시절의 습관 아니었을까) 끊은 후에는 말씀이 많아지고 기도도 더 길게 하셨다. 엄마의 마음이란, 왜 늘 걱정으로 가득한 걸까.
할머니는 연세가 들수록 귀가 어두워졌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위해 전화가 오면 깜빡이는 조명을 방과 부엌에다 설치해 드렸다.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해 전화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멀리 계시는 본인의 엄마와 계속 이어져 있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를 돌아보니 휴대폰이 널리 보급된 지금이 얼마나 편리하고 행복한 시절인가를 느낀다.
할머니가 원래 사시던 넓은 기와집에는 큰 외삼촌 가족이 살고 있었다. 장남인 큰 외삼촌과 막내인 엄마 사이 나이 차이는 컸는데, 서른이 넘어 아이를 낳은 엄마와 달리 외삼촌은 일찍 가정을 꾸려 사촌들 간에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기와집이라지만 농가였던지라 담이라 부를 만한 시설은 없었던 것 같다. 집은 너른 논밭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마당을 지나 한참 걸어야 다른 집이 나왔다. 집 앞에는 논밭과 달리 푸릇함이 느껴지는 정원도 있었던 것 같지만 나는 그 차이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어린 나에게는 흙길과 돌길(아스팔트, 콘크리트)만 달라 보였고 풀은 그저 풀일 뿐이었다. 다만 아주 큰 감나무가 마당 중앙쯤에 위치하여 가을에 주렁주렁 열린 감을 구경한 기억은 있다. 감나무 앞으로는 닭과 개가 지나다녔고 감나무 너머에는 화장실과 축사 건물이 있었는데 축사 안에 토끼와 염소가 있어 신기하게 구경했다.
할머니댁과 다소 멀어 자주 가진 않았지만, 갈 때마다 외숙모는 늘 부엌에 계셨다. 돕는 손이 있긴 했지만 늘 뜨끈하게 유지되던 방 안에 앉은 이들이 심심할 때에도 외숙모는 주방일을 하고 계셨다. 아궁이 시설이 남아있던 기다란 부엌에서 방마다 불을 때어 구들장을 데워주실 때면, 나도 외숙모 옆에 앉아 땔감을 집어넣고는 했다. 식사를 내어주실 때는 뜨거운 그릇도 맨손으로 잡으시는 모습이 놀라워 슈퍼맨 같아 보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늘 진 부엌에서 고되게 일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사촌(언니오빠)들과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기에 그들은 늘 집에 없거나, 있더라도 어울려 놀 일이 없었다. 데면데면한 사촌언니와 어른이 되어 얘기해 보니, 첫 방문 때 예쁜 원피스에 구두를 신고 온 서울 꼬맹이가 흙길이 더럽다면서 꺅꺅 대는 게 얄미웠다고 한다. 어쩐지 안 놀아주더라니, 첫날부터 미운털이 박힌 것이다.
외갓집의 수장이셨을 외할아버지는 내 삶에 사진 한 장으로만 남으셨다. 공주님 같이 예쁜 엄마가 이제 갓 걸음마를 할 듯한 나를 안고 환하게 웃고 계신다. 엄마 옆에는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언니가 서있고, 우리 뒤에는 하늘색 포니 자동차가 당당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 옆에는 지금 기준으로 봐도 멋쟁이라 할 법한 쓰리피스 양복과 베레모를 걸친 할아버지가 미소 띤 얼굴로 앉아 계신다. 기억에는 없지만 그분이 내 할아버지라고 한다(아마도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은 우리 아빠일 테지).
할아버지는 평생 자신의 삶을 누리느라 할머니와 자식들의 삶 속에 없으셨다고 한다. 엄마의 삶 속에 없었으니 내 삶엔들 있었을 리가 없다. 집이 부유했다고는 하나 남편의 도움 없이 자식 여섯을 건사하고 노인이 되어서까지 걱정하며 사신 할머니의 삶이 어땠을지, 아무리 상상해 봐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 할아버지를 보고 자란 장남(큰 외삼촌)이 아내를 고생시킨 것도 당연한 이치일지 모른다.
할머니가 계셨기에 엄마가 있고 내가 있고 또 내 아이들이 있다. 힘겨운 시절을 견디고 자식을 단단하게 키워낸 모든 엄마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부디 다음 생에서는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사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강한 모성애가 대물림하여 잘 이어질 수 있도록 나도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