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전날 밤, 늦은 귀가로 피곤에 절어있는 신랑을 일으켜 세워 아침 9시에 내보낸다. 어렵지는 않지만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 한가득이라 서둘러야 한다. 내가 들고 가면 힘들 것이라 숙소의 짐을 챙겨 신랑 손에 들려 보낸다. 아이들의 하루는 이미 진작에 시작되었다. 아빠가 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장시간 동안 아이들의 지루함을 최소화하여 기다리는 것이 오늘 엄마의 과제이다.
숙소 1층에 위치한 베이커리 카페에 가서 스팀밀크를 곁들인 1인 1빵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방에 와서 에그박사 책을 보며 놀다가, 근처 백화점 문화센터에 가서 색칠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중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키즈카페에서 뛰어놀다 지칠 때쯤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차에 올라탄 아이들은 피곤했는지 금세 잠이 들어버렸기에, 엄마가 아빠의 업무를 넘겨받아 마무리하기 수월했다.
이 키즈카페는 두 번째 방문이었다. 아이들이 갓 뛰어놀기 시작할 무렵 처음 왔는데, 생긴 지 얼마 안 된 대형 키즈카페의 크고 멋진 시설에 압도되었다. 2시간 동안 열심히 놀아도 다 못 볼 것 같다고 생각했다(아이들이 쪼꼬미라 보폭도 작고 오래 못 뛰던 때였다). 그런데 3년 만에 재방문한 이곳은 기억처럼 크지 않았다. 키즈카페 아래층에 있던 대형마트가 철수하는 바람에 건물 분위기도 썰렁하고, 주인으로 보이는 분이 카운터에서 외부 예약시스템보다 저렴한 현장결제를 유도하셨다(수수료 때문일 거라 짐작했다). 이 정도 사이즈의 키즈카페를 만드는데 투자금이 얼마나 들었을지, 아래층이 마트라는 이유로 부동산 가격에 붙었던 프리미엄은 얼마였을지, 생각하니 가슴속에 찬바람이 지나가는 것 같다.
신랑과 결혼하기 전에는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더라도 사장님이면 다들 부자인 줄 알았다. 결혼하여 자영업자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니,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생계를 위해, 투자한 돈이 가진 전부라 어쩔 수 없이 가게 운영을 이어가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자영업 비중이 너무 높은 것이 우리나라 경제구조의 문제점이라는 이유가 그래서였구나 깨달았다.
더 놀라운 건 건물주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건물이나 토지, 집이 있으면 부자라고 생각했는데, 재산이 있어 더 부자유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담보로 받은 빚, 부동산으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세금과 공과금, 감가상각 및 건물을 관리하기 위해 알고 챙겨야 하는 것 등등. 부유함의 필수조건은 자유로움이라 생각했는데, 부동산이나 사업체는 오히려 거대한 족쇄가 되어 발목에 채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삶에 실망했다. 사람의 삶이라는 게 '저런 부'를 축적하기 위해 일생을 바쳐 일하고, 또 누군가는 그걸 빼앗으려 노력한다니. "행복해지는 게 꿈"이라던 내 말에 비릿한 웃음을 보이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걸까. 어른이 될 때까지 디즈니 만화 같은 꿈속을 살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라도 그런 삶을 거부하고 싶었지만 대안이 없어 보이는 게 더 좌절이었다.
그나저나 삶에 순응하여 열심히 최선을 다해도 저렇게 주변 상권이 죽어 버리면 방법이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오프라인 상권의 몰락은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니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좋은 나라일수록 복지가 잘 되어있다고는 하나, 부동산이나 큰 사업장을 보유한 소위 "자산가"에게는 혜택이 주어지지 않는다. 아예 아무것도 없는 자는 국가가 조금 도와주지만, 무언가를 해보려다가 수렁에 빠진 사람에게는 도움의 손길이 없다는 것은 창업가 정신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 아닐까.
아이들이 잠든 사이, 이번에는 엄마가 나서서 할아버지의 서류 작업 마무리를 도와드렸다. 얼마 전 생신을 맞으신 할아버지(시아버님)와 생일 케이크를 나누며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싶었는데 극구 사양하신다. 좀 과하지 않은가 싶을 정도로 강하게 요청드려 보아도 끝까지 거부하셨다. 성의를 무시당한 신랑은 부아가 나는지 괜히 나에게 짜증을 부렸다. 요청조차 하지 않으면 거절당할 일도 없을 텐데, 내가 애써 추진하는 바람에 연거푸 거부를 당해 그런 것 같았다.
나도 안다, 부모가 자기와 시간 보내기를 원치 않을 때 자식은 크게 상처받는다. 자식이 찾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부모 자신은 얼마나 자식을 찾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삶에는 자식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면서 자식의 삶 속에 자리가 항상 있길 바라는 건 너무 이기적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아무리 봐도 부모자식 사이에는 자식이 절대 을인 것 같다. 평생토록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는 을.
사람 마음이야 본인(부모님)의 것이니 내가 바꿀 수 없고, 자식 입장인 나는 나중에 후회하기 싫어서 우리의 할 일(최소한의 도리)을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