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2일
어제, 밤 늦게까지 방학 스케줄을 짜는 기획노동을 했다. 요즘 신랑 눈치 때문에 여행을 자주 못하느라 잊고 있었지만, 동선 짜고 일정 잡는 일에는 시간이 많이 든다. 하지만 나는 그걸 아주 잘하는 편이고 또 좋아하기에 고생스러운 줄 모르고 할 수 있다. 걸림돌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신랑이 태클을 걸면 애써 세운 계획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점이고(혼자 가버리면 가족여행이 아닌 데다 아이들이 계속 눈치를 볼 것이다), 두 번째는 늦게까지 일했어도 아침 8시에는 일어나 일과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끝을 모르고 달려가던 기획노동 열차는 새벽 3시 반쯤 잠에서 깬 둘째가 "엄마, 어딨어?"를 외치면서 강제 정차 되었다.
아이들을 등원시킨 후 남은 카레에 면을 넣어 카레라면을 끓여 먹는다. 어젯밤 신랑이 라면을 끓여 먹을 때, 냄새가 몹시 유혹적이었으나 나는 참아냈다. 뿌듯하다. 잘했어, 나 자신! 야식을 참은 다음에 먹는 음식은 그게 무엇이든 자존감에 이롭다. 집안일을 조금 한 후 신랑에게 밑반찬 곁들인 점심을 먹인 다음 나갈 준비를 한다.
오늘은 아이들 유치원에서 새 학기 설명회가 열리는 날이다. 선생님도 요 며칠 기획노동을 많이 하신 것 같다. 자료를 잘 준비해 주신 덕분에 필요한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올해도 이곳에서 성장할 아이들의 모습이 기대된다. 신뢰할 수 있는 선생님을 만나 감사하다. 등원할 때만 해도 설명회가 끝난 후 엄마아빠를 따라 일찍 귀가하겠다던 아이들의 마음이, 막상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놀다 보니 달라졌다. 덕분에 엄빠의 자유시간은 1시간 반 연장되었다.
저녁 메뉴로는 미역국을 끓이고 육전도 구웠다. 미역국은 한 그릇씩 잘 먹었건만, 육전은 인기가 없었다(어떻게 육전을 안 좋아할 수 있지?).
매일 하는 똑같은 집안일이 진절머리 나게 싫을 때가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쌓여있는 설거지를 보니 숨이 턱 막힌다. 거의 매일, 십수 년 동안 하루에 2~3번씩 설거지를 해야 한다 생각하니 기절할 것 같다. 스트레스가 너무 쌓이기 전 적당히 외식도 하고 여행도 가줘야 하는데, 설 연휴와 방학기간에 놀 비용을 아끼느라 계속 집밥 퍼레이드다. 다른 사람이 차려줄 때는 포근하던 집밥이 내가 차려야 할 때는 폭력으로 느껴진다.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우니 아이들이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한다. 보통 10분 정도 이야기하다 마는데, 오늘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마칠 생각을 않는다. 밤을 샐 기세이던 아들들의 입담은 아빠의 면박에 멈추어버렸다. 어둠 속에 가만히 누워 소리 없이 눈물을 닦는 둘째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아이들이 잠들어야만 자기 방으로 옮겨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머리를 식힐 수 있으니 조바심이라도 난 걸까. 오늘따라 왜 저리 감정적인지, 우리 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의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에 온 가족이 맞춰야 한다는 게 어이없다.
엄마가 전업주부인 덕분에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은 짧지 않다. 하지만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할 시간은 짧다. 아침에는 등원 준비하라 닦달하고, 저녁에는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씻고 잘 준비하느라 시간이 다 지난다. 오죽하면 아이들이 엄마는 주방이랑 욕실에 있다고 말할 정도다. 짧은 대화는 많이 하지만, 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일은 많지 않다.
오늘 아이들은 엄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났고 그것을 전하려 한 것이다. 하나가 끝나면 다른 게 생각나고, 다른 아이가 한 말을 듣고 또 새로운 게 떠오르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를 이어갔을 게다. 두뇌가 활발히 가동되고 주목받는 느낌에 행복해하고 있는데 아빠가 버럭 듣기 싫다고 면박을 준다. 서글퍼져 눈물이 나는 게 당연하다. 남편이 나에게 가끔 못되게 구는 건 참고 넘길 수 있지만, 아이를 건드리는 건 안 될 일이다. 다시 그러지 않도록 짚고 넘어가야겠다.
매일 주어지는 24시간 중,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아이를 돌보는 것은 보람차지만 집안일에 허덕여 아이를 못 보는 것은 불쌍하다. 나는 요즘 불쌍하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