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2일
어제는 기절해서 잤다. 푹 자고 눈을 뜨니 다들 아직 자고 있다. 잘 됐다. 구석에 앉아 어제 못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암막커튼을 걷으면 아이들이 일찍 깰 테니 닫아두고, 아이들의 무의식이 엄마의 존재를 느끼도록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는다. 어두운 곳에서 휴대폰을 하면 눈에 많이 안 좋다고 하는데, 가끔은 이게 최선이다. 눈을 보호하려 주위를 밝히면 아이들이 깨어나 글 쓸 시간이 없어진다.
아이들이 하나둘 깨어나도 신랑은 한밤중이다. 푹 자게 놔두고 숙소 앞 카페에 가서 빵과 우유를 사 왔다. 아이들이 빵을 먹고 기분 좋게 노는 동안 글을 완성했다. 신랑이 일어나자 모두가 옷을 갈아입고 수영장에 갔는데, 다음 일정까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30분만 놀고 올라왔다. 서두르는 게 싫은지 "수영장을 안 가거나 다음 일정을 안 가면 되잖아"라고 불평하는 신랑에게 "1시간만 일찍 나왔으면 다 해결 됐을 텐데"라고 대답했다.
신랑은 물놀이를 안 했기에 씻을 필요가 없었다. 다음 일정에 늦지 않도록, 아이들만 먼저 씻겨서 아빠와 먼저 보내고 엄마 혼자 씻고 짐정리를 해서 택시를 타고 뒤따라갔다.
오늘 가는 곳은 내가 무척 애정하여 주기적으로 방문하려 노력하는 곳이다. 기아자동차에서 운영하는 성수동 매장 '언플러그드 그라운드(KIA Unplugged Ground)'인데, 내부에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라운지를 만들어두고 한쪽에다 <자란다 키즈존>(아이를 잠시 맡길 수 있는 유료 놀이방 브랜드)을 집어넣었다. 부모가 방해받지 않은 채로 자동차도 구경하고 한숨 돌릴 수 있도록 말이다. 누가 기획한 건지 몰라도 정말 칭찬한다. 성수동을 좋아하지만 가족과 아이들이 환영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던 사람들에게, 이 장소는 숨겨진 보석 같은 존재이다.
예약이 어렵긴 하다. 경쟁률도 높고 팝업의 성지 성수동에 있다 보니 내부행사가 많아 예약 가능 일정이 안 열릴 때도 있다. 하지만 예약에 성공하면 회차당 70분 정도(하루에 2회 차까지 예약 가능)는 선생님들이 아이에게 미술 놀이 지도를 하며 돌봐주신다(무료). 다른 자란다 키즈존에 가서 140분 동안 아이를 맡기면 인당 35,000원 정도의 비용이 발생하는데, 그걸 기아자동차에서 내주는 것이다. 나는 '차는 역시 독일차지'라고 생각하던 겉멋만 든 차알못이지만, 고마워서 다음 차는 기아차를 고려하고 있다. 고마워서가 아니더라도 기아차가 패밀리카의 선두주자이기도 하고 말이다.
1회 차가 끝나고 2회 차가 시작되기 전, 아이들에게 뭔가 먹이기 위해 또 김밥을 시켰다. 맵다는 말에 먹어보니 정말 조금 매콤하다. 내가 20대 때 좋아하던 스쿨푸드 마리를 시켰는데, 아이들에게 먹여본 적은 없어 매운 줄 몰랐다(오징어먹물마리와 모짜렐라스팸계란마리 안에 매콤한 재료가 곁들여져 있었다).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게 돈카츠마리밖에 없는 것을 속상해하고 있는데, 눈치 없는 신랑이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그냥김밥 시키지"라고 한다. 저 인간은 신혼까지도 안 저랬는데 출산하고 나니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말을 거칠게 하고 있다. "쓸데없다는 건 오빠 생각이고, 나한테는 쓸데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고 했더니 민망한지 젓가락을 던져놓고 가버린다. 분노가 나 어버버 하면서 "저런 행동은 완전 성격파탄이니 따라 하면 안 돼. 자기 기분이 안 좋다고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소리치는 건 예의가 아니야"라고 아이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수영장에 이어 체험장까지, 엄마나 아빠나 참 모범이 되는 부모다.
체험이 끝난 후에는 우리가 좋아하던 빵집에서 식빵을 사 먹고, <넘버블록스(Number Blocks)> 뮤지컬을 보기 위해 근처 공원으로 이동했다. 어제 너무 바쁘고 피곤해 예매를 깜빡했는데, 다행히 네이버에서 당일 예매가 가능했다. 지난여름방학 때 이미 흥행에 성공하고 앵콜공연 중인 작품이라 관객은 적고 공연 퀄리티는 좋았다. 요즘 넘버블록스를 틀어주면 재미없어하던 아이들의 마음 안에서 넘버블록스의 수명이 조금 연장된 것 같다.
공연이 끝나면 저녁을 어디에서 먹을지 정해두라고 신랑에게 일임했는데(신랑은 공연을 안 봤다), 나와서 물어보니 아무 생각이 없다. 알아본 곳 없으면 그냥 백화점이나 쇼핑몰에 가자고 했더니 주차하기 힘들다며 거절한다. 일요일 저녁에는 차가 별로 없다고 해도, 숙소 근처에 가서 찾아보겠다고 한다. 숙소 위치가 오피스 밀집지역이라 일요일 저녁에는 안 하는 곳이 많다고 말해줬는데도, 굳이 고집을 피우길래 "그럼 알아서 정해"라고 했더니 어느 골목에 들어가 식당을 찾겠다고 기웃 거린다.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오빠 혼자 먹을 때 길에서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는 경우가 몇 번이나 있어?" 물으니 대답이 없다. "오빠 혼자 먹을 때도 최소한의 검색은 하면서, 왜 애들이랑 먹을 때는 대충 하고 치우고 싶어 해?" 했더니 버럭 화를 내며 말 걸지 말라고 한다. 울화통이 터진다. 맘 같아서는 머리통을 때리고 싶다. 하지만 나는 교육받은 문명인이니까 성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보고 자란 대로 행동하면 내 아이들에게도 대물림이 된다. 참는다.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사이 차 안에서는 30분 넘는 정적이 흘렀다. 조용히 기다려주자 신랑은 메뉴를 정한 후에 목적지를 찾았고, 우리는 능이버섯 삼계탕으로 기력을 보충한 후 숙소에 들어왔다. 신랑 눈치 보느라 저렴한 비즈니스호텔로 잡았는데, 인원추가비에 주차비까지 내고 나면 저렴하지가 않다. 몇 만 원만 더 내면 훨씬 안락한 곳에서 잘 수 있는데, 속상하다. 내 눈에는 이런 게 '소탐대실(돈 조금 아끼려다 여행의 질이 떨어지니까)'인 것 같은데, 신랑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하다. 물어봐도 말 안 해줄 테니 안 물어보고 말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