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2월 24일

by 란님


"엄마, 밖에 눈이 와요!"

창밖을 보니 보일락 말락 한 눈송이가 흩어지고 있다. 아침으로 먹으려고 꼬마김밥과 짜장떡볶이를 주문했는데 눈이 와서 그런지 도착이 늦어진다. 9시 반~11시 20분 타임에 어린이과학관을 예약해 뒀지만, 입장이 늦어져도 취소되는 건 아니라고 하니 먹고 천천히 가야겠다.


오전 10시에는 우리 동네에서 하는 아이들 공연을 예매해야 한다. 시간 맞춰 기다리다가 10시 땡 하자마자 들어갔음에도, 가운데 앞자리들은 누르는 사이 선점되어 버려 다 놓쳤다. 요즘 사람들은 아이돌 콘서트와 야구 예매 등으로 단련되어 그런지 예매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숙소 밖으로 나오니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여 있다. 특히 나무 위에 쌓인 눈은 환상적이다. 첫째는 아는 체를 하느라 구상나무도 있다며 산타할아버지가 오시겠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구상나무는 산 위에서 자라는 나무라고 에그박사 책에서 분명히 본 것 같지만 지적하지 않기로 한다. 남부지방에서 나고 자란 신랑은 오랜만에 마주하는 눈길에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눈에 가려 차선이 잘 안 보이긴 했만, 신호 정지선을 저만치 떨어트려놓고 차를 멈춰 세워 나의 놀림을 받았다. 눈길 운전이 많이 신경 쓰이는지 숙소를 나서자마자, 오늘 여기서 하루 더 머물든가 지금 떠나든가 하자고 말한다.


눈이 꽤 많이 오긴 하지만 유리창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눈이다. 와이퍼에 밀려난 눈도 뭉쳐있지를 못하고 녹아 흘러내린다. 일기예보를 보니 점심 너머까지 눈이 많이 내리다가 오후 3시쯤부터는 거의 내리지 않을 예정이고, 기온도 계속 영상 4도 언저리를 유지할 거란다. 그래도 눈이 쌓이면 위험하다고 하길래, 밤이 되면 그렇지만 우리는 오후에 떠날 예정이라고 말했다. 여기는 인구 144만의 광역시이고, 우리나라 제일 고속도로인 경부를 타고 갈 것이며, 가야 할 곳은 인구 66만의 도시이다. 낮시간 통행량이 많은 시간대에 이동할 것이니, 서울에 비해 제설장비가 부족할지는 몰라도 조심해서 다니면 걱정할 일은 없을 거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러한 근거로 온김에 그냥 놀다 가자고 했더니 "언제는 내 말 들었나?" 하며 삐친다. "오빠 의견이야 항상 듣지. 근데 데이터에 근거해서 내린 판단이 아니라 그냥 '눈 오니 다니기 귀찮다'라는 감정 때문면 안 듣지. 오빠 감정 변화에 모두가 휘둘릴 수는 없어. 배고프니까 짜증 나는 거야, 밥이나 먹어 얼른." 심한가 싶기도 하지만, 랑의 자신감을 불려주자고 엄마가 바보처럼 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육아를 하며 깨달은 것은 사람도 기계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관리를 해줘야 잘 돌아간다. 인간의 의지만으로 모든 걸 이겨낼 수 있다는 건 오만이고 오판이다. 신생아와 마찬가지로 어른도 잠 잘 자고 밥 챙겨 먹고 화장실도 잘 가야 하는 게 기본이고, 온도와 습도도 적정해야 기분이 안정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무력한 아이와 달리, 어른들은 자기 스스로가 컨디션을 관리할 줄 알아야 하는 것뿐다.



대전을 방문한 가장 큰 이유였던 '국립중앙과학관'에 도착하였는데, 주차 후 실외로 한참 걸어야 해서 포기했다. 아이 셋을 데리고 물 먹은 눈이 쌓여있는 길 위를 으며 젖은 눈을 맞는 일은 자신 없다. 옷은 털고 말리면 되지만 신발은 오늘 내로 복구가 안 될 것이다. 하루가 날아가버린다.


과학관 대신 전망 좋기로 유명한 카페에 갔으나 안개로 인해 바깥 온통 하얗다. 휴대폰을 보니 지인의 메시지가 와있는데 도서관 홈페이지가 먹통이란다. 그러고 보니 11시에는 나를 위한 운동 수업에 등록했어야 했는데 까맣게 잊 있었다. 홈페이지가 다운되어 청시간이 뒤로 밀린 덕에 무난히 성공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애들 공연만 시간 맞춰 예매하고 내 운동은 잊어버리다니, 나 자신을 너무 뒷전으로 미룬 것 같아 반성해 본다.


하얀 풍경을 감상하며 쉬다가 다음 일정으로 이동였다. 낭만적인 설경은 로 옆으로만 보이고, 우리가 달리는 차도는 온통 진흙물 가득찼다. 빠르게 달리는 차가 지나면서 옆차선에 있는 우리차에 시꺼먼 파도가 밀려온다. 미디어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 같다.


음 일정인 '대전어린이회관'은 지인이 알려주어 발견한 곳인데, 입구 바로 앞까지 차가 들어올 수 있어서 좋다. 입장까지 시간이 조금 남길래 계란과자와 우유를 사 먹이고 신청해 둔 <수리수리 마술교실>에 갔는데 아들들이 무섭다고 안 들어간단다. 도대체 어떤 포인트가 무섭다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지만, 어르고 달래 보아도 끝까지 안 들어간다. 강요하는 엄마의 모습에 거부감만 더 커지는 느낌이다. 결국 딸만 혼자 들어가서 카드마술을 배워왔다.


다음 예약 프로그램인 뮤지컬 공연서는 딸이 무섭다고 눈물을 뚝뚝 흘린다. <미녀와 야수> 였는데, 야수가 사실은 왕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보니 그저 무섭기만 한가 보다. 만 보니 아가씨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화만 버럭버럭 내는 야수가 꼭 요즘 우리 신랑의 모습 같기도 하다. 신랑도 연애할 때랑 신혼 때는 안 그랬다가 육아하면서 갑자기 야수로 변는데, 마녀의 주술에 걸린 걸까.


대전을 떠나기 전 성심당에 들렀다 가고 싶었는데, 눈이 쌓이는 바람에 가장 가까운 지점도 20분이나 걸린다고 해서 포기했다. 결국 대전에 21시간 정도 있으면서 어린이회관 하나만 다녀온 것인데, 그마저도 아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 허탈하다. '차라리 롯데월드나 한 번 더 갈 것을, 괜히 욕심내서 대전까지 왔다'며 자책하다 한숨 자고 나니 기분이 나아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있다. 대설특보가 그러하다. 내가 무슨 예언가도 아닌데, 천재지변은 봐주자. 자책 금지.


천안에서 친구를 만나기 전, 며칠 동안 쌓인 빨래를 박스에 담아 편의점 택배로 부쳤다. 트렁크가 가득 차니 여행하기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새로 이사한 친구네 집 구경하러 갔다. 근처 고깃집에서 밥을 먹고 디저트를 사서 단지 내 키즈카페로 놀러 간다. 아이들이 노는 동안 내일의 계획을 공유하고 숙소로 이동했다.


오늘 숙소는 친구네 아파트 게스트하우스이다. 게스트하우스에는 처음 묵어보는데 집만 덜렁 있어서 각종 세면도구는 물론이고 이불, 수건, 물, 컵 등을 모두 준비해와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담요 몇 개 들고 왔고, 나머지는 친구가 다 준비해 주었다. 덕분에 편하게 잤지만, 고생시켜 미안한 마음이 든다. 호의를 받고 나면 "미안해" 보다는 "고마워"가 맞을 텐데, 폐 끼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나의 고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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