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8일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걷으니 기분이 좋다. 창 너머로 아이들이 나고 자랐던 동네가 보인다. 곳곳에 명소가 많은 서울 안에서도 나는 이 동네를 가장 좋아한다.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안하다.
아주 오랜만에 호텔 조식을 먹으러 갔다. 신용카드 발급으로 획득한 멤버십 혜택 덕에 아이들은 무료이고, 나는 2만 원만 추가 결제하면 된다니 안 먹을 이유가 없다. 신랑은 차라리 잠을 더 자겠다고 해서 놔두고 다녀왔다. 자주 먹을 때는 귀찮아서 안 먹기도 했던 조식이지만, 직접 밥을 차려 보니 이만한 게 없다. 여러 가지 메뉴를 취향대로 골라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집밥이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객실로 돌아와서 신랑을 깨워 옷을 갈아입고 수영장에 갔다. 아빠가 깜빡한 준비운동을 아이들이 시작하여 다 같이 하게 되었다. 하나 둘 셋 넷 구령을 붙이며 짤막한 몸을 휘휘 움직이는 것이 너무 귀엽다. 어른들이 많은 분위기라 무서운지 쭈뼛거리며 수영을 즐기지 못한다. 덕분에 1시간을 있는 동안 대부분은 엄마가 번갈아가며 잡아줘야 했다. 아빠는 할 일이 있다며 자쿠지에 앉아 휴대폰만 보고 있다. 나도 수영 연습 좀 하고 싶은데, 좋은 수영장에 와도 수영을 할 수 없는 게 아쉽다. 객실로 돌아와 아이들과 아빠가 따뜻한 물에 목욕하는 동안 엄마는 짐을 챙긴다. 모두의 준비가 끝난 후에, 아이들 옷 위에 한복을 입혀서 나왔다.
숙소 바로 옆에는 대한제국의 사적지가 있다. 사유지가 아니지만 호텔 바로 옆에 붙어 있어, 호텔 시설을 이용하지 않고 한복 사진을 찍기는 조금 불편하다. 그래서 숙박하러 왔을 때 사진을 남기기로 한다. 아이들 사진을 찍을 때는 짧고 굵게 가야 한다. 집중하는 시간이 길지 않고 금방 지겨워하기 때문이다. 초조한 마음으로 차에 카메라를 가지러 간 신랑을 기다렸는데, 신랑은 휴대폰만 보며 빈손으로 왔다가 다시 되돌아간다. 그럴 수 있다, 감정을 다스린다. 어젯밤에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건만 왜 잊어버린 건지 생각하면 아쉽지만, 그것 역시 그럴 수 있는 일이니 따지지 않는다.
드디어 카메라가 내 손에 들어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몇 장 찍지도 않았는데 통제하기 어려운 상태로 빠져든다.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수영을 하고 온 덕분에, 아침 먹은 게 소화된 데다 벌써 점심시간이니 배가 고플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놀다가 수영까지 했으니 노곤노곤 피로감도 느껴질 것이다. 게다가 각자의 욕구가 다르다. 첫째는 그저 장난치며 도망 다니고 싶고, 둘째는 자기가 엄마를 찍어주겠다며 엄마에게 다가오고, 셋째는 비눗방울 만들기 놀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사진사(엄마)의 지시 따위는 귀에 안 들린 지 오래이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초조하지만 티 내지 않으려 누르는데, 둘째와 셋째가 싸우면서 울음을 터트린다. 점점 차오르던 나의 감정 주머니도 함께 터지고 말았다.
화를 내게 될까 봐 혼자 구석으로 이동하여 마음을 추스른다. 이럴 때는 결혼선배 친구가 알려준 방법을 써야 한다. '음소거 모드로 혼잣말하기'이다. 입모양만 나불거리며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욕설을 공기로 내뱉는다. 아이들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일을 나 혼자 다 해야 하는 느낌은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다. 더 이상 찍어봐야 아이들 표정도, 나의 시선도 아름다울 것 같지 않아 촬영을 접는다.
아빠가 차를 가져올 동안 호텔 화장실로 가서 한복을 벗었다. 오후에는 미리 신청해 둔 음악센터 체험수업에 가야 하는데, 시간이 1시간 남짓 남았다. 목적지 근처로 이동하여 아이들이 고른 돈가스를 점심으로 먹는다. 음악수업은 아장아장 걸을 무렵 음악 문센(문화센터 프로그램)에 보내봤고, 작년에 한 음악학원에서 2차례 들어본 경험이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면 좋을지 감이 안 잡혔다. 근처 피아노 학원에 그냥 등록시켜 주기에는, 나 자신이 유년시절 피아노학원에 다니기 싫어했던 기억이 남아있어 내키지 않는다.
이곳 음악센터는 장비가 훌륭하고 전 세계 지사에서 공통된 커리큘럼을 활용한다는 장점이 있다. 연령대별 목표 설정도 분명하고 수업을 진행해 주신 선생님도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보여 마음에 들었다. 나도 이런 학원이었다면 재밌게 다녔을지 모른다. 다만 학원에 다니면서 체계적으로 배우기에는 아직 어린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설명회에서도 지금은 음감과 박자감을 익히고, 손가락 힘이 생겨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는 건 7살 이후라고 한다. 아직은 음악을 많이 들려주고 같이 노래 부르는 걸로 족하지 않을까 싶다. 내년에 다시 와봐야겠다.
체험수업이 끝난 오후 4시경에 출발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 늦게까지 놀다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신랑이 너무 힘들어할 것 같아 참기로 했다. 그런데 신랑은 나와 마음이 많이 다른 것 같다. 나에 대한 배려가 없다. 여행일정을 오늘 마무리 짓기로 한 것은, 신랑 친구가 우리 동네에 놀러 온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앞당겨 돌아가면 친구네까지 볼 수 있으니 빨리 가려고 한 것인데, 바쁜 일이 생긴 친구네도 여행을 하루 일찍 마무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 돌아가도 못 만나는 건데, 그럼 우리 하루 더 놀다 가도 되는데, 어제 알았다면서 왜 나에게는 오늘에야 공유해 주는 건지 답답하다. 오늘은 언니네가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기에, 미리 알았더라면 하루 더 머물다가 얼굴을 보고 가는 걸로 정했을 텐데 말이다. 오늘은 왜 이렇게 하루 종일 신랑이 미워 보이는지 모르겠다. 미운 짓을 하니 그런 건지, 내 기분이 안 좋은 건지. 자기가 가족들과 친하지 않다고 해서 나의 가족들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이기적으로 느껴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서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