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어젯밤 늦게 잠자리에 들었으니 늦잠을 잘 줄 알았건만, 8시가 되자 어김없이 아이들은 눈을 뜨기 시작한다. 조금이라도 더 자겠다며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다 배고프다는 말에 몸을 일으킨다. 해가 길어지고 있다, 오늘은 꼭 암막커튼을 달아주리라.
오랜만에 집에서 맞이하는 아침이 여유롭다. 식탁에 앉아 각자가 원하는 시리얼을 골라 아침으로 먹고, 원하는 놀이를 하며 논다. 물론 엄마는 놀지 못하고 어젯밤부터 이어지는 빨래와 설거지를 한다. 오늘은 아마도 종일 빨래를 해야 할 것 같다.
아침에 마트에서 식재료를 주문하긴 했지만 요리할 시간은 없을 듯하여 반찬집에서 반찬도 여러 개 시켰다. 밥을 하려고 보니 밥솥 내솥의 뚜껑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없다고 밥을 못할 일은 아니다. 예전에도 깜빡하는 바람에 안 끼우고 밥을 한 적이 있다. 윤기 좔좔 흐르는 밥이 아니라 고슬고슬한 밥이 완성되는데 아쉬운 대로 먹을 만하다. 밥솥의 수명이 줄어드는 것은 조금 걱정되지만 말이다.
반찬을 두 개씩 골라 갓 지은 밥과 함께 차렸다. 아이들에게는 진미채 간장볶음과 맛살 계란말이를 주고, 어른들은 매콤한 두부조림과 꼬막양념을 먹었다. 밥을 먹고 치운 후에는 근처에 있는 '만세운동 기념관'에 가볼까 싶어, 신랑에게 얘기했더니 거길 왜 가냐고 한다. "삼일절이니까 가지"라고 했지만 대답도 없고 표정도 시큰둥하다. 밖에는 비바람이 분다. 강력하게 추진하기에는 내 몸이 너무 피곤한 상태라 의욕을 잃고 "그냥 집에서 쉬자"라고 말한 후 침대로 가 누웠다.
깜빡 잠이 들었다 깼더니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난다. 아빠가 아이들에게 나가자고 하는 소리이다. 가만 들어보니 스크린 골프장에 가고 싶은데 혼자 가기는 미안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가려는 것 같다. 골프 연습이 생각나는 걸 보니 약속을 또 잡았나 본데, 들은 바는 없다. 잠든 나를 배려해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려는 것 같아 고마우면서도, 교육적인 장소는 안 가려고 하면서 음침한 스크린 골프장에만 가려는 게 얄밉다. 게다가 왜 나만 쏙 빼고 간다는 말인가. 너무너무 섭섭하다.
나가는 모습을 배웅하려고 보니, 아이들이 내복을 입은 채로 패딩을 걸치고 있다. 다행히 양말은 신겼지만 비바람이 부는 와중에 내복이라니 안 될 말이다. 바지라도 입히라고 했더니 실내에 가는 거라 필요 없단다. 실내라고 해도 주차장도 지나야 하고 어쨌든 외출하는 건데 내복바람은 좀 아니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안 가겠다고 한다. 너무나도 당혹스럽다. 갱년기가 일찍 온 것인지 자꾸만 감정이 널뛰기를 하는데,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되는 걸까(신랑이 5살 연상).
안 간다는 말에 아이들이 귀엽게 항의하자 다시 태도를 바꾸어 아이들을 챙겨 나간다. 바지는 입히길래 그냥 두었다. 다들 나간 텅 빈 집에 앉아서 일부러 "오예"를 외쳐보았지만 하나도 신이 나지 않는다. 버려진 강아지가 된 기분이다. 우울해서 간식이나 시켜 먹으려고 자주 가는 카페 주문 페이지를 열었지만 '매장이 혼잡하여 딜리버스 서비스가 일시중단 되었다'라고 뜬다. 웃긴 건 일시중단이라면서 적용시간이 15:51~21:00 라는 것이었다. 포기할까 하다가 오기가 나서 배달이 되는 곳을 찾아 와플을 시켰다. '내가 아는 그 맛(생크림+사과잼 조합)'을 먹으니 기분이 좀 나아진다.
좋게 생각하자. 신랑은 내게 자유시간을 주려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 것이다. 아빠가 운동하는 동안 아이들은 유튜브를 보며 과자나 먹겠지만, 좋게 생각해 주자. 빨래를 하고, 브런치에 올릴 일기를 쓰고, 웹서핑이나 하며 노닥거리고 있는데 2시간이면 올 줄 알았던 아이들이 오지를 않는다. 차에서 낮잠이라도 자고 있는 것일까. 밥 차릴 준비를 하고 있으니 아이들과 신랑이 드디어 돌아왔다.
아이들을 안아주며 잘 다녀왔는지 물어보다 유튜브를 본 이야기도 나왔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것을 봤다. 낮잠도 안 잤고, 간식 먹는 시간 외에는 계속 유튜브를 봤나 보다. 간식도 구운 계란 외에 두 종류의 과자를 먹었다고 한다. 저녁도 먹여야 하는데 어쩌자는 걸까. 신랑은 계산이 빠르고 총명한 사람이지만, 계획성이 부족하다.
둘째는 다리가 아프다며 징징대다가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다 같이 빈둥대다 저녁밥을 차렸다. 유통기한이 오늘까지인 두부를 꺼내어 굽고, 낮에 주문한 반찬을 꺼냈다. 어른용 반찬은 두부구이 외에 제육볶음을 데웠고, 아이들에게는 메추리알 장조림과 분홍소시지 구이를 주었다. 후식으로는 아까 주문해 둔 와플을 꺼내어 반쪽씩 제공했다. 먹은 걸 치우고, 씻고 양치하고 손톱발톱을 깎고, 책 읽고 다리까지 주물러주고 나니 11시가 훌쩍 넘었다.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은 좌절감이 들지만, 사로잡히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