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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띵꼽미Think of me Sep 25. 2022

사랑의 가치 판단에 관하여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가 사랑에 빠지기 가장 쉬운 상태라는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종종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에게 한눈에 반하기도 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어떤 모습을 보고 매력을 느끼기도 하며,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불과 몇 마디만 주고받았을 뿐인 사람 때문에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그 위대한 감정은 때때로 우리의 마음을 고양시켜 이 세계에서 쓰러져가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때로는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따뜻한 배려의 모습을,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고 우유부단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내비치기도 한다. 이토록 놀라운 기질, 의식이 감히 통제할 수 없는 이 무의식적인 감정의 촉발은 대체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며 그 방향은 어디로 향하는 것인가?


  사랑이라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라고 한다면, 사랑에 대해 우리 각자가 찬미하는 것이 제각기 다른 것이라면, 사랑을 다루는 주제는 보편적 논쟁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시대에서 사랑이라는 것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껴보았을 어떤 감정—언어로 표현하자면, 정념(passion)—을 우리는 모두 내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얼마나 많은 히스테리를 남겼는지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물음은 필연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우리가 마땅히 던져볼 수 있는 의문일 것이다.


  오늘날의 심리학자나 뇌과학자는 흔히 우리가 사랑을 할 때 느끼는 감정을 생물학적 역학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한다. 사랑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은 호르몬이며, 여러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됨에 따라 우리의 기분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과학은 사랑의 과정을 호르몬이 분비되는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먼저 사람들은 자신의 반쪽, 즉 운명의 상대에 대한 희망과 갈망에 가득 차 있다가, 마음에 드는 이성을 보면 흥분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과몰입에 빠지게 되고, 몰입의 유효기간이 소멸되는 순간, 사랑에 대한 회의를 느끼다가 친숙함의 단계에 접어들어 보다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즉 과학적 해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랑은 뇌에서 움직이는 호르몬의 상호작용의 결과인 것이다—내게는 과학의 이러한 설명이 스탕달의 사유에 빚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스탕달 역시 사랑을 단계별로 나누었으며, 그 내용 또한 과학적인 부분을 제외한다면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사랑을 할 때 느끼는 인간 감정의 변화 과정은 과학적 연구들을 통해, 실험 결과의 가시화를 통해, 호르몬을 지칭하는 과학적 용어들(아드레날린,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을 통해 단순하게 일단락되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물질들을 이미지로 환원시켜, 거기에 낯선 이름을 부여한 다음, 각각의 신경물질의 특징을 우리에게 설명한다. 우리는 당황스럽지만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그러자 그들은 사랑을 할 때 우리의 뇌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에 대한 증거들을 제시한다. 우리가 저 막강한 데이터 앞에서 기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학이 새로운 종교로 자리 잡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과학적 실험을 통해 증명된 결과라고 한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중세의 성직자가 “그것이 신의 뜻이니라……”라고 말하는 것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처럼, 이제부터는 과학을 하나의 객관적 사실이자 진리로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실제로 서른을 넘긴 사람들부터는 사랑을 호르몬 작용의 결과로 믿고 있다는 것을 통계에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이다—!


  과학의 지위와 명성이 올라갈수록 우리는 조금씩 그 객관성에 의문을 던지지 않게 되었으며 가치 판단의 기준 또한 점점 과학화되어가고 있다. 나는 과학에 대한 믿음이 두터운 사람으로서 말하는 것이다. 우려되는 것은 과학 그 자체가 아니라, 과학에 대한 믿음이 지나친 편견이 되어 다른 가치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고, 과학에 대한 우리의 무조건적인 믿음이 누군가에 의해 이용당하는 것이다.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과학적 해석의 가치를 따져보고 거기에 의문을 던져보는 것이야말로 정직한 사유의 시작일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사랑을 신체의 화학작용으로 해석한다고 한들, 사랑에 대한 과학적 견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체념한다고 한들,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전망이 열릴 것 같지는 않다. 권태기에 빠진 연인들이 “우리가 스킨십을 해서 옥시토신이 분비되면 이 권태기를 극복할 수 있을 거야.”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 애초에 권태로운 상태에서 스킨십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혹은 사랑이 식어서 불안해하는 연인에게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이 처음처럼 뜨겁지 않은 이유는 나에게 도파민이 더 이상 예전처럼 분비되지 않기 때문이야.”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모든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과학의 언어가 일상적인 의사소통에서 비일비재하게 사용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따라서 사랑의 과정을 단순 명료하게 생물학적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사랑의 개념을 보다 논리 정연하고 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모호하게 만들 뿐이다. 객관적이라고 판단되는 저 과학적 해석은 인간이 흐느끼고 분출할 수 있는 감정적 측면보다는 생물학적 측면에서 가치가 있음을 우리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 사랑을 해석하는 ‘학문적 관점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판단하건대, 사랑에 대한 가치 평가가 신체의 화학 작용으로 계속해서 강조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 동시다발적으로 촉발되는 감정들이 몇몇 생소한 언어들 사이로 사라져 극단적인 편견을 형성하는 데 자리를 내어주고 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와 도덕적인 편견에 지나치게 동화된 나머지, 자유와 평등이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처럼 말이다…….


  고대의 플라톤에서 현대의 에리히 프롬, 금세기의 알랭 바디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자와 예술가,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사랑에 대한 다양한 의문과 새로운 논점들이 제시되어 왔다—‘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감정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사랑에 열광하는가’, ‘어떻게 해야 더 잘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란 무엇인가’, ……—. 그러나 거기에서 궁극적으로 도출된 결론들이 신격화되거나, 극단적인 성욕으로 치닫거나, 인간적인 모순에 의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나는 지켜보았다. 그러나 나는 저 위대한 저자들의 노력 덕분에 사랑에 대한 새로운 가치에 의문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더 잘 사랑하는 것만큼 삶을 더 잘 사는 것은 없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가치,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간절한 덕목으로 생각되는 ‘공생(共生)’의 개념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으로 하여금 현대인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치란 무엇이며, 어디서 그 가치를 찾아야 하는가?


  나에게 이런 의문이 찾아오고 나서, 인류가 어떻게 오늘날 낭만적 사랑의 가치를 만들어 내었고, 심리적 변화 과정 속에서는 어떤 이유들이 강조되어 왔으며, 어떤 이유들이 은폐되었는지 조목조목 따져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여기서 정치, 사회, 종교, 경제, 문화를 주름잡는 ‘세계사’라는 거대한 역사의 장막에 가려진 인류의 오래된 풍습 중 하나인 ‘사랑의 기원’을 파헤치고자 한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사랑의 역사적 기원이 아니라 거기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 즉 ‘새로운 가치’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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