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너는 회원이 존재해야만 그 가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피트니스 시장은 다양하게 모객을 위한 노력을 한다. 내가 일하고 있는 공간에서는 모객을 위해 블로그를 5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제법 오랜 기간 블로그를 운영하다 보니 어떻게 블로그의 레벨(?)을 올리고 유지할 수 있는지 평균 이상의 이해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존재의 이유를 대변해주는 블로그 관리를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이웃 관리'이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에게 소통이란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그것이 형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이런 소통은 오프라인을 넘어서 온라인에서도 '나'를 대변하기 위해 꼭 필요한 '로직'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이 중요한 이웃 관리를 5년 넘게 하다 보니 오프라인으로 알고 지낸 것 마냥 꾸준하게 소통하는 이웃님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 분들은 다양한 직종에서 다양한 목표를 갖고 블로그에 자신을 투영한다(그리고 대개 상업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 그중 꾸준하게 소통하시던 한 분은 미술을 전공하신 분이셨는데 어느 날 이웃님의 블로그에 소통하러 갔다가 그분께서 올리신 공지를 보게 되었다.
'원데이 클래스 모집'
틈틈이 이웃님 지도 아래 하얀 도화지가 계절을 대변하는 예쁜 꽃과 식물들로 바뀌는 포스팅을 종종 보았다. 형식적인 반응의 댓글을 남길 수 있었지만 그 날은 왜인지 모르게 이런 단어들에 꽂혔다.
'초보자도', '누구나', '소수로 진행'
쥐어본 것이라곤 덤벨과 바벨과 같은 쇳덩이가 전부인, 굳은살 박히고 휘어진 손가락을 가진 내 손이 붓을 쥐어보면 어떨까? 4명이서 하는 수업이라면 조금은 덜 부끄럽지 않을까?라는 생각들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완전히 색다른 내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니 심장이 쿵쾅대고 가슴은 설레었다. 무언가에 홀린 것 마냥 나는 원데이 클래스 모집 글에 비밀 댓글을 남겼다.
'저.. 저도 해볼 수 있을까요?'라는 댓글에 흔쾌히 수락해주신 덕분에 그 즉시 선생님 계좌번호로 수업료를 이체해드렸다. 많은 회원님들과 상담을 해본 경험으로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무엇인가 하기 힘들어지는 것을 수도 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는 도저히 새로운 것을 도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보다 더욱 솥뚜껑 같은 손을 갖고 계시는 동료 선생님을 한 명 더 영업해서 그렇게 운동만 한 남자 둘은 땀냄새가 아닌 종이와 물감 냄새로 가득한 아뜰리에로 향했다.
결전의 장소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는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막상 하려니 괜한 선택을 한 것이 아닌지, 미술에 '미'자도 모르는 내가 이웃님 커리어에 먹칠을 하는 것은 아닌지, 본인의 수업 홍보를 위해 진행하는 클래스인데 홍보하기에도 창피한 결과물을 만들어 난감하게 해 드리는 것은 아닌지 등등... 긍정적으로 어지럽혀졌던 머릿속은 부정적으로 어지럽히기 시작했고 같이 택시에 탑승한 솥뚜껑 선생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뜰리에로 향하는 것이 자동차 바퀴가 아니라 내 다리였다면 즉시 가던 길을 멈추고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아뜰리에 문 앞까지 도착하여 모나리자를 훔치러 온 도둑 마냥 기를 죽이고 문을 빼꼼 열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반겨주었지만 모든 것이 생소하였다. 이런 공간은 학생 때 미술실 이후로 처음이었다. 석고상이 너희가 올 곳이 아니라고 하는 것 같았고 작고 동그랗고 딱딱한 미술실 의자는 우리가 앉기엔 작고 불편해 보였다.
그렇게 어색함과 생소함, 그리고 선생님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시작한 미술 수업. 우리가 한 수업은 엽서 크기의 도화지에 수채화를 그려 액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알고는 왔지만 '아이고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함이 없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걱정은 여기까지였다. 선생님은 프로셨다.
선 그리기부터 농도 조절하기, 그리고 물감이 아닌 물을 사용하기 등 수채화를 그리는 데 필요한 기본기를 천천히 알려주셨다. 섬세하지는 못했지만 하라는 대로 하니 얼추 비슷한 모양새가 나오는 것이 재밌어지고 도움이 필요한 부분은 선생님께서 도와주시며 결과물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셨다. 그러면서 쭈뼛쭈뼛한 우리 마음도 어느덧 그럴싸하게 변하며 수업에 젖어들었다. 나는 나뭇잎이 달린 리스를 만들었고 동료 선생님은 민들레 씨앗을 그렸는데 함께 참여하신 다른 수강생분들보다는 확실히 퀄리티가 떨어지긴 했지만, 어느덧 3시간이 지난 후 내 손에는 그럴싸한 액자가 들려져 있었다. 내 생애 첫 번째 수채화 작품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우려와는 다르게 무사히 결과물을 만들어 냈고, 우리의 순간들 역시 일일 선생님이었던 이웃님의 블로그에도 포스팅되었다. 무게를 드는 것이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새롭기도 하고 내면에는 미술이라는 분야가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들은 이뿐만 아니라 내게 다른 깨달음을 주었다.
보통 퍼스널 트레이닝을 시작하는 분들은 운동을 매개체로 어떠한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다. 그리고 그분들 중 대다수는 운동이 익숙하지 않은, 운동을 해본 경험이 적은 분들이다. 이 분들에게 차가운 쇳덩이들과 운동의 열기가 어떻게 다가가 질까? 18살 때부터 운동이 익숙했던 나에겐 따뜻한 그 열기가 이 분들에겐 너무나 뜨거운 용광로와 같아 쉽게 다가가기 어려우시진 않을까? 문의를 주시고 상담을 예약하고 어색한 공간에서 처음 보는, 자기와는 다른 형태의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과 마주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이 택시 안에서 느꼈던 그것들과 비슷하진 않을까? 처음 몸을 쓰는 것이 처음 붓을 잡아 본 내 느낌과 비슷하진 않을까?
내게 '미술'이 그들에겐 '운동'이었겠지. 모든 것이 생소하고 두려우셨겠지. 이런 것들을 이겨내고 시작하신 분들은 정말 대단한 분들이구나(심지어 나는 두려워서 솥뚜껑 선생님을 영입해서 둘이 갔다. 그런데 우리는 퍼스널 트레이닝이기 때문에 혼자서 움직이셔야 한다!). 엄청난 용기를 갖고 시작하신 분들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알려드려야지. 처음은 모두가 어색한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