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더위
나는 싱가포르(新加坡, 신가파)에 산다.
늦은 밤 공항에 내려 달랑 짐 가방 두 개를 끌고 택시를 잡으러 공항 문 밖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둔탁한 공기에 숨이 턱 막혔던 게 2년 전이다.
사실 습하고 더운 공기는 2년 넘게 살았던 홍콩에서 많이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더운 공기에 숨이 막히는 건 적응이나 면역이 아닌 방귀나 트림처럼 막을 수 없는 생리적 현상 같다. 사람마다 역치는 다르겠지만.
이 더위는 정적이지 않고 동적인 상태이다.
흔히 더위를 떠올릴 때 지치고 축 늘어진 몸을 연상하는데, 이는 더위와의 사투의 피상적 결과물일 뿐 그 이면에는 가을 운동회 기마전 틀을 짊어진 분주한 발과 같은 치열함이 있다.
이 치열한 사투는 매일 아침 8시 50분에서 9시 사이의 찰나에 일어난다.
출근 시간 지하철 역을 나와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야외 공간이 그 장엄한 전쟁터인데,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등줄기를 따라 흐른 땀을 셔츠에 묻히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꼳꼳한 척추와 고층 빌딩 사이로 부는 후덥지근한 도시풍에 장단을 맞춰 현란하게 춤추는 마 셔츠가 어우러져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있노라면, 나는 이미 늦은 오후에 버금가는 피로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출근 도장을 찍는다.
더위가 일상이 되고 매일이 될 때 시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데, 이는 연과 월일 사이에 계절이란 개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느 동남아 국가처럼 싱가포르에도 '우기’가 존재하긴 하지만 이는 강수량의 변화일 뿐 온도나 습도, 일출 혹은 일몰 시간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일상 대화 속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대신하여 날과 달만 사용되고, 날씨의 변화를 감지하고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달력 숫자의 차오름으로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게 된다.
그래서 이 곳 사람들은 계절 단위로 준비하지 않고 연 단위로 계획을 세우곤 하는데, 어찌 보면 더 철저한 준비와 유동성을 동시에 요하는 환경인지도 모르겠다.
더위에 지치고 단조로운 개념에 지칠 즈음 다양한 민족과 언어는 싱가포르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다민족, 다언어는 더위라는 하드웨어 환경을 싱가포르로 완성시키는 고유한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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