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은 누군가의 인생으로 들어가 삶의 방향을 바꾸어놓는다.
삶이 고달플수록 예술의 무게는 더 깊어지나 보다. 적어도 내가 봐 왔던 작품들 속에서 성공은 언제나 감정과 반비례했다. 그리고 현실은 언제나 우리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빡센 편이었다.
그때 우리가 알고 있는 주인공들은 인생의 비애를 예술로 풀어냈다. 그들에게 예술은 고된 수행 끝에 얻어낸 값진 사리와 같은 맥락의 것이랄까.
어려웠다. 나는 스스로 인생의 비애를 예술로 푸는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다. 반 고흐나 메릴 스트립처럼 나도 만약 그때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면 이야기가 조금은 달라졌을까?
때론 열심히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리고 때론 스스로 생각해왔던 것보다 별로인 자신의 모습을 감내해야 하는 순간도 온다.
나의 가치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의 차이에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나’의 가치를 부정했었다. 그리곤 스스로의 결핍에 무릎을 꿇었다.
좋아하는 문구가 있다.
아주 힘들 때 이 문구를 통해 위로했던 기억 때문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던 사람이 전혀 아니었음을 마침내 인정하면 검은 수령에 빠져들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내 상처와 흉터를 마주하면서 도리어 강해진다는 걸 문득 깨달았습니다.” - 파울로 코엘료 [ 스파이 ]
인간은 어리석다. 한 걸음만 나아가면 그 실패가 사실은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될 텐데, 한걸음을 나서기도 전에 스스로 인생의 낙오자가 되어버린다. 낙오자가 되어버린 인간들은 혹시 이뤄질지도 몰랐던 자신의 꿈을 그렇게 생매장시킨다.
애석했다. 자기 손으로 자기 꿈을 묻어버릴 계획을 세워 놓고서는 슬펐었다.
‘왜 늘 내가 진심을 담은 일들은 함몰할까’, ‘왜 하느님은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실까’ 그렇게 믿음도 없던 하느님께 한참을 고하고 나면 마음은 더 무거워져 있었다.
가끔 어떤 말은 격언으로 남아, 누군가에게 미래를 살아가는 기준이 되어주기도 한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면의 것을 볼 수 있도록 어떤 한마디가 나를 깨워 줄 때가 있다.
그렇게 한번 새로운 생각과 마주하고 나면, 마치 죽음 뒤 더 이상의 것은 없다며 주장하던 이가 직접 사후의 세상이라도 보고 온 듯. 속해있는 세상의 깊이가 달라진다.
“버티는 게 이기는 거야.”
오만 편견의 덩어리였던 내게 ‘이긴다’는 개념은 늘 쉽고 간결했다.
증명해줄 전리품이 있는 누가 봐도 명확한 승리. 그것이 내게 있어 이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번도 버티는 게 승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끈기를 모른 채 살아왔던 내게, 지루한 선택을 인내해본 경험이 없던 내게
그 말은 은인이었다. 그리고 어른이었다. 정말 어른 같은 말이었다.
가끔 어떤 말은 격언으로 남아 누군가의 삶을 일으킨다.
그리고 살아가는 희망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런 말, 그런 생각, 그런 글을 짓는 사람이고 싶다.
누군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Best regards,
H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