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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쥬 Dec 13. 2018

죽음에 대한 단상

짝꿍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처음 맞닥뜨린 죽음에 대한 기억


 1992년 겨울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이전 어릴 때의 일들을 거의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없어 이따금 부모님을 서운하게 만들기도 했던 내가, 그때의 일은 그렇게도 선명히 기억한다. 다섯 살이었다. 할아버지가 들 것에 실려 집 문을 통해 안방 한가운데로 모셔졌다. 나는 거실에 멀뚱히 서서 사람들의 기묘한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가친척들이 다 모였다. 할아버지를 에워싼 식구들이 조용히 가시는 길을 지켜보았다.


 호랑이상이었던 할아버지는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겁을 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 자전거 뒤에 올라타 시골길 방둑을 달리던 기억도 난다. 둘째는 아들을 바랐는데 딸이라 하니, 대구에서 서울로 먼 길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낳은 즉시 얼굴만 슬쩍 보고 그냥 내려가 버리셨다는 할아버지셨다. 그런데 나는 커가며 특히 할아버지한테 참 살가웠다고 한다. 조부모 댁에 갈 때면 할아버지 곁에 찰싹 붙어 있곤 했으니 더 이상 나를 미워할 수 없으셨을 거고 아마 미안한 마음도 있으셨는지 나를 매우 아껴 주셨다. 그런 할아버지가 세상에 더 이상 안 계시다는 사실을 다섯 살의 내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짝꿍 아버지의 부고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주변에서 부고가 들려와도 내가 그렇게 살 맞대고 가깝게 정을 나눈 사람들이 떠나간 경우가 없었다. 어쩌다 보니 나이가 서른이 넘도록 장례식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겪은 장례식이, 미국의 장례식, 그 주인공은 나의 father-in-law인 짝꿍의 아버지, Leo다.


 마지막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처음 Leo를 만났던 4년 전만 해도, 비록 심장에 페이스 메이커를 달고 한쪽 다리가 불편했지만, 원래는 180cm가 넘는 키에 체격이 건장하고 생기가 있었다. 항상 수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정신없이 풀어놓으시고, 밝고 유쾌한 유머와 미소를 가지신 분이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무척이나 친절하셨던 분.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심장에 문제가 반복되면서 여러 번 지난한 수술 과정을 거쳐야만 하셨다. 그 과정에서 그 컸던 키는 쪼그라들고, 마른 나뭇가지처럼 점차 말라 가셨다. 내가 마침내 미국으로 영구히 오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크게 쇠약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생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무척이나 강하셨다.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들도 많은데 그의 시계는 차츰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평생을 도시 생활보다 한적한 산자락에 거처를 두시고 지내셨지만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면서 어쩔 수 없이 병원이 있는 도시와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 근처에 노인 아파트를 얻으셨지만 어떻게 해서든 본인의 집에서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셨다. 우리가 도움을 곁에서 드리고자 거처를 합친 지 불과 몇 달 만에, 이내 병원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종종 통화를 할 때면, 도시의 소음과 공해에 대한 불평, 병원이 하나 도움도 안 된다고 잔뜩 불만을 털어 놓으시다가 끝에는 얼른 좋아져서 다시 집에 가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해야지 하며 희망을 품곤 하셨다.


 그런 본인의 의지와 달리 곧 입퇴원을 반복하기 시작하다 끝내는 심장의 문제가 간과 신장에까지 미치기 시작했다. 투석을 해야 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통화를 하는데 목소리에 온통 힘이 없으셨다. 그 와중에 간호사가 들렀는지, Leo가 전화기 너머로 방해하지 말라고 자기 지금 daughter-in-law랑 통화하고 있다고 막 화를 내셨다. 그가 나를 온전히 가족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는 생각에 찡해졌다. 의사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치료가 되는 개념은 없고 생명을 그저 유지하는 정도라는 이야기를 해왔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Leo는 일단 병원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 하셨다. 누가 병원을 좋아하겠냐만은, 심장과 관련된 여러 차례의 수술을 거치며 자신의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지는 경험을 하며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셨고, 그와 동시에 병원에 대한 신뢰도 점차 잃어 가셨으니 더욱 그러했다. 병원에서는 일단 생명 유지 장치들을 떼어내고 투석을 중단하면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Leo는 투석도 중단, 향후 심폐소생술도 거부, 즉 삶의 마지막 안정을 도모할 호스피스 절차를 밟기로 결정하였다. 최초에는 산자락 본인의 집으로 오고 싶어 하셨고 나 역시 기꺼이 간병인 노릇을 할 수 있다고 한 참이었다. 그런데 의료진 측에서 장장 2, 3시간에 달하는 이동 시간을 당장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여 우선 노인 아파트로 이동하여 추이를 보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게 호스피스로 인계된 첫째 날이었다. 딸기쉐이크가 먹고 싶다고 하셔서 호스피스 간호사의 허락을 받고, 쉐이크를 사서 갔다. 많이 걱정했는데 병원을 벗어났다는 사실 때문인지, 만면이 화사하게 느껴질 정도로 생기가 도셨다. 소식을 들은 몇몇 주변 사람들이 방문을 이어갔다. 웃으며 대화하고, 농담까지도 했다. 호스피스 간호사와 오전에 잠시 들른 수간호사도 처음 차트를 받아 보고 많이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왔는데 생각한 것보다 너무 좋으시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짝꿍을 비롯 직계 가족들은 Leo에 관한 각종 정보 접근 권한을 얻기 위해 위임장을 얻었고, 그의 주변 상황들을 파악하며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생이 저물어 가는 동안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둘째 날에는 그간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게다가 왕복 5시간의 운전을 도맡아 해야 했던 짝꿍이 많이 지쳐한 관계로 방문을 다음 날로 미루고 말았다. 전날 봤던 모습도 있고, 둘째 날도 막내 여동생으로부터 좀 피곤해하시지만 아직은 괜찮다는 말을 듣고 이내 안심한 부분도 있었는데, 셋째 날이 밝아 아침 일찍 들러보니 이미 Leo는 더 이상 대화가 가능하지 않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비스듬히 세워진 침대 위에, 얇은 시트만 살짝 덮은 깡마른 상체가 드러나 있었다. 더위를 느끼시는지 겉옷 입기를 완강히 거부하셨다고 간호사가 설명을 덧붙인다. 한눈에 보기에도 온몸이 샛노란 빛이었다. 고개를 가누기도 힘들어 보이셨다. 그보다 고통으로 가쁜 숨이 공간의 정적을 메웠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천천히 메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을 쥐니, 온 힘을 다해 꼬옥 내 손을 붙드셨다. 눈물이 맺히고 목이 메어 뭐라 말하기가 힘들었다. 말을 하면 들으실 수 있다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들로서 받은 충격이 훨씬 더 컸을 짝꿍은 그대로 굳어 있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짝꿍의 손을 Leo의 손 위에 포갰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시간을 주려고, 혹은 나의 눈물을 감추려 몇 발작 뒤로 물러났다. 먼저 와 있던 두 여동생들과 눈이 마주치니 그제야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한동안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로를 피해 보려던 각자의 흐느낌은 이내 뒤엉켜 버리고 말았다.


 이따금 옆에서 누구라고 하면, 눈을 번쩍 뜨기도 하셨다. 응답을 못해 그렇지 말을 걸면 짧은 고갯짓이나 반가운 손님을 알아보고 옅은 미소를 보여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마에 그려진 내 천 자가 점차 깊게 패여만 갔다. 간호사는 환자가 표현은 할 수 없지만 극심한 고통에 있다고 했다. 모르핀을 비롯 약물 용량을 늘려 주문하겠다고 알려줬다. 그렇게 어둠이 내렸, 집에 둔 강아지들 때문에 출퇴근을 해야 했던 우리는 저녁 7시 정도가 되어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We love you, Leo. I'll keep you in my prayers. Will be back tomorrow."라고 한 뒤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그리고 저녁 9시가 좀 넘은 시각, 아직 도로 위를 달리고 있던 우리는 연락을 받고 말았다. Leo가 숨을 거뒀노라고.


 미 퇴역 군인의 장례식


 Leo의 장례식은 그가 숨을 거둔 지 딱 2주 만에 치러졌다. 그는 베트남 참전 용사다. 미국의 상이 훈장 격인 퍼플하트를 수여받은 퇴역 군인. 내가 처음 접한 장례식이 미국의 장례식, 그중에서도 military funeral인 셈이 되었다.


 유해는 생전 소망에 따라 화장되었다. 리버사이드에 위치한 국립묘지에 도착하여 안내에 따라 장례 장소로 이동하여 자리를 잡았다. 유족과 조문객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손을 올려 예를 갖췄다.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직후 트럼펫으로 Taps가 연주되었다. 보통은 시신이 담긴 관이 성조기에 덮였다 이를 특정한 방식으로 다시 접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발사된 탄피 세 개를 성조기 안에 동봉하는데, 화장되었기에 퍼포먼스는 공중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서비스 멤버는 유족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은 채 아래의 문구를 읊으며 성조기를 전달하였다.


 “On behalf of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the United States Army and a grateful nation, please accept this flag as a symbol of our appreciation for your loved one’s honorable and faithful service.”


 나라를 위해 복무한 퇴역 군인에 대한 존경 그리고 그 영예로움을 느낄 수 있는 엄숙하고 매우 상징적인 장례식이었다. 종종 참전 당시의 에피소드들을 풀어놓기도 했고 참전 군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기에 Leo가 참 좋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모신 목사님이 마지막 절차를 진행하셨다. 고인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궤적을 읊어 주시고, 참석한 사람들에게 남을 만한 말씀을 나눠 주셨고, 끝으로 Leo를 위해 다 함께 기도하며 떠나보냈다. 조문객들은 유족인 우리에게 다가와 조의를 표해 주었다.


 향후 조문객들은 근처 예약된 레스토랑으로 이동하여 다 같이 식사를 하며 Leo에 대한 추억을 나누었다. 자발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인과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나눠 주었는데 마냥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재밌고 유쾌한 기억들도 함께 공유하는 매우 따뜻한 시간이었다. Leo에 대해 잘 모르던 이야기들, 낯선 친인척들이 전해주는 가문에 대한 이야기들까지 모두 흥미로웠다. 고인의 마지막 뒷모습이 더 이상 쓸쓸하지 않게 느껴졌다. 글쎄,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주 멋진 장례식이었다.


 죽음에 대한 단상


 만 70세 생일을 얼마 넘기지 않은 어느 날 그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조금이나마 더 시간이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나 빨랐다. 호스피스로 인계된 지 3일 정도만이었으니. 마음을 온전히 전하지 못했는데,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싶어 후회가 밀려온 것이 사실이다. 집으로 모시고 옆에서 마지막 가는 길을 완전히 지켜드리고 싶었는데 마지막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 더구나 Leo가 평소 알던 목사님을 돌아가시고 만 그다음 날 아침에 모시기로 했었다. 종교적인 의식을 숨을 거두기 전에 나눴다면 완전한 안식의 확신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러지도 못한 것이었다.


 집안에 남아있는 그의 물품들을 정리하러 온 집안을 헤집다 그가 머물던 방에 들어섰다. 찬기가 가득한 방안, 그가 머물던 어지러운 공간이 눈에 들어오니 울컥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꾸준히 기록해 온 삶의 기록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다. 쇠약해지는 자신과 그럼에도 아직 이뤄야 할 것들을 갈망해 온 한 사람의 고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노년에 하곤 하는 죽음을 준비하는 책이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열어 보았지만 빈칸이 채워지지 않은 새 책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Leo가 자신이 이제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먼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은 알게 된 때는 차분히 죽음을 준비하기에는 매우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떠난 사람은 더 이상 말이 없다. 유언이 없이 떠나갔고 그의 재정 상황이나 재산 목록들을 뒤늦게 다뤄야 하는 가족들은 많은 혼란을 겪었고, 겪고 있고, 또 겪어 가야 한다.


 삶이란 무척이나 고귀하면서도 찰나에 불과하여 한편으로 허망하지만 그렇기에 주어진 오늘 하루를 소중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점점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경험이 잦아질 것을 생각하니 덜컥 두려운 마음이 밀려왔다. 특히 이렇게 먼 곳에 나와 가족과 떨어진 생활을 수년 간 이어온 나는 어쩐지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이었다. 부모님께 그저 마음을 전할 뿐이다. 늘 죄송스럽고 곁에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나를 이해해 달라고, 그리고 언제나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따뜻하게 건네보려 했다. 여전히 내 걱정뿐이라는 나의 부모님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또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 것이라 북돋아준다. 어떻게 해도 내게는 후회가 남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감사한 마음은 그때그때 반드시 전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기로 결심했다. 가족에게든, 내 주변 사람들 누구에게든 말이다. 주어진 오늘이 어쩌면 다시없을 오늘일지도 모르거니와, 이렇게 무수한 하루들이 모여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니 허투루 보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직 30대 초반이니 무척 이르지만, 나의 죽음이 어떠할 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에 대해 떠올릴수록, 최후에 대해 생각할수록, 어떤 면에서 지금 그리고 현재 누리고 있는 삶에 대한 애정이 북돋는다. 막연하지만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살아가는 것과 면이 닿아있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닐 테다.


 글의 끝에 짝꿍을 생각한다. 몇 해 전 사랑하는 형을 황망하게 보내고, 이제는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했다. 우울증으로 무척이나 힘들어하는 와중에 이렇게 또 다른 삶의 무게가 덮쳐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실제로 본인의 닫혀 있는 마음 상태 때문에 그는 그간 아버지에게 많은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였다. 고장 난 마음을 품고 서툰 표현마저 하지 못하는 짝꿍은 그렇게 계속된 악순환의 늪에 허우적 대고 있다. 내가 들어줄 테니 무슨 이야기든 해도 괜찮다고 다독여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Leo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운전하는 동안 거의 한 시간도 넘게 눈물을 흘렸다. 그 슬픔의 깊이를 가늠할 길이 없다. 그저 인내심을 갖고 옆에서 신경을 거스르지 않을 만큼 그 문을 두드려 볼 뿐이다. 내가 여기에 있다고. 가끔은 짝꿍을 바라보며 무척 겁이 나고 두려운 복잡한 심경이 되기도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줄 수 있을까. 떠나간 그의 형과 아버지를 향해 외쳐본다. 이 친구를 부디 지켜달라고,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그리고 약속해 본다. 내가 짝꿍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몫을 온 힘을 다해 해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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