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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쥬 Apr 18. 2018

비자발적 떠돌이

나는 어쩌다 한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나?

 "너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처음에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 간다고 했을 때, 내가 그랬잖아, 왠지 너는 거기 가면 영원히 안 돌아올 것 같다고."


 어렴풋이 기억이 날듯도 하다. 2011년, 늦겨울에서 초봄이라 부르는 때였다. 지인의 말에 무슨 언령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때로부터 더 이상 나고 자란 곳으로 돌아오기 힘든 길을 향해 자꾸만 걸어갔다. 누군가는 역마살이라 하였고, 왜 그리 인생을 힘들게 사느냐 물었고, 아니 또 지금은 어디에 있느냐고 의아해했다.

 꿈을 향해서

 캐나다로 떠난 워킹홀리데이 이후 한국에 돌아왔다. 물론 대학교 4학년이라는 타이틀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고 머릿속은 온통 흐트러져 무언가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꿈. 나는 대한민국의 '누구나'가 그렇듯, 대학교 4학년이라면 응당 마주해야 할 취업 전선에 등 떠밀려 나와 있었다. 야금야금 언론인을 향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당당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 연거푸 고배를 마시던 어느 날, 조언을 듣고자 학교를 통해 마주한 헤드헌터는 그 꿈을 이루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일갈했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그렇게 적당히 나 자신을 포기했을 때, 취업을 했다. 회사를 다니며 배우고 보는 세상은 그동안 학교를 다니며 꿈꾸던 세상과는 많이 달랐다. 나쁜 의미도 좋은 의미도 아니다. 그저 세상이 이렇게 자본의 논리로 움직인다는 것을, 왜 꿈을 묻던 어른들은 아무도 허심탄회하게 말해주지 않았던 걸까? 수없이 많은 불나방이 뜻 없이 불을 향해 쏘날리듯 대부분의 꿈들은 불 앞에 으스러져 가거나, 혹은 타협하고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저 차분히 나아가게 된다.

 가장 꿈꾸던 것은 이루지 못하게 되었지만, 나는 그다음 소망했던 승무원이 되어보고자 회사를 다니는 한 편 애를 썼다. 그리고 끝내 그것이 되어 한국을 다시 떠나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선망으로 바라보기도 하였고 깎아내리려고도 하였다. 마음에 담아봤자 별 의미 없음을 알았기에 우쭐하지도 상처받지도 않았다. 간절히 바라고 노력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상처받고 끝나는 시대이기에, 나는 그저 조금 때가 맞아 들었고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나를 매일 더 알아가기를 소망하며

 한동안 취업으로 피 말리며 패배감에 온통 휩싸여 있던 내게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돌아볼 여유란 없었다. 내 삶의 무게중심은 대체 어디에 놓여있는가, 그리고 누가 그것을 조종하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 데에는 모두 다른 계기가 있을 것이다. 내 경우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떠나서였다. 오롯이 일직선으로 그려진 삶에서 수직으로 튕겨나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아냈던 1년여의 시간. 아마도 물 속에 푹 잠겨 허우적대느라 미쳐 바라보지 못했던 내 스스로를 물 밖으로 잠시 나와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몰랐던 내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궁극적인 질문들 앞에 더 자주 서보곤 했다. 중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도, 세상의 인정도 아닌 마음속에 있음을 배워갔다. 온통 세상이 강요하는 성공의 가치에 매몰되어 단 한 번도 본인의 삶을 주도해내지 못하는 것, 스스로에 대한 온전한 이해라곤 해보지 못한 삶에 애도를 표하게 되었다.


 평범한 삶은 왜 나쁜가? 꿈을 이루지 못한 인생은 왜 패배자인가? 대다수는 그럼에도 잘 살아가는데. 시간이 지나면 직장인은 그저 비슷비슷한 직장인일 뿐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처음을 대기업에서 시작한 친구도, 중견기업에서 시작한 친구도. 다소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잃고 얻는 것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본전 찾기 정도다. 성공한 인생이라 평가받는 삶에도 굴곡은 있게 마련이고, 허겁지겁 고지에 올라섰지만 왜 올라왔는지를 몰라 허탈감을 맛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나도 한동안은 패배자라고 스스로를 여기며 살았다. 누구나 살며 패배감을 맛본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는 건 희망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참, 그 전제조건은 그 희망이 이 사회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겠지만. 패배자만 수두룩하게 쌓여 가는 구조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어쩔 수 없는 선택

 이 사회는 참으로 협소한 성공의 기준을 가지고 있고, 지독한 엘리트주의를 끝내 버리지 못하면서, 수많은 영혼들을 갉아먹는다. 특히 여자로서 내 주변의 훌륭한 인재들은 앞으로 지금까지의 가치로는 더 이상 평가받지 못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친구들끼리 모이면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된다. 만약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까지 한다면 이 직장생활은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숫자게임의 말일뿐임을.. 참 빨리도 깨달았다. 취업할 때부터 성별 쿼터, 배경에 매겨지는 숨은 점수, 위계질서를 해치지 않을 직급별 적당한 나이 때 같은 것들. 기회의 문이 열리고 선택 받기 위한 그 수동적 시간들이 주는 좌절을 겪어본 참이다. 오늘날까지 그 자리를 단단히 붙들어온 친구들에게도 가혹해 보이는 한국에 내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감히 넘보지 못할 선택지였다.

 왜냐하면 난 서른을 넘겼고, 여자이고, 지금껏 경력 따위 애매한 수준에 머무를 것이고, 그렇기에 기회가 한없이 줄어들 것을 알았다. 또다시 날 둘러쌀 그 눈들이 신경 쓰이는 내가 한심하게도 느껴졌지만 사회의 기준에 의해 끌어내려져 난도질당할 나 자신을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두려움이었다. 내 나라임에도 내 설자리를 못 찾을 것이라는 두려움. 하지만 나는 이 역마살이라 불려 온 생활을 정리할 때가 도래했음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다른 나라에 영구히 터를 자리 잡기 위해 떠나오게 되었다. 그리 대단한 결정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편에 가까웠다. 또다시 이방인이긴 하지만 역마살의 꼬리표는 떼어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지금 내가 있게 된 곳은 미국, 여행이 아니라 삶을 꾸려온 것으로는 캐나다, 아랍에미리트연합을 거쳐 세 번째 나라이다.

 처음 다음엔 미국으로 갈거라 말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나의 선택을 무한히 응원해 주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아니 왜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그런 선택을 하냐 물었다. 혹시 뭐 사고 쳐서 잘린 거 아니냐 했다. 그럼 거기 가면 무슨 답이 있느냐며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새롭게 무언가를 하기엔 나이가 좀 애매하지 않나 혹은 뭐하러 굳이 고생을 사서 하냐며 측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대다수 사람들에게 어떤 불안의 감정을 야기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 나이엔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만 보는 걸까. 걱정해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조금 달리 살아간다고 해서 틀린 것은 없다.

 선택은 나의 몫,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열심히도 필요 없다. 그냥 이렇게, 계속해서, 꾸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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