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 사랑해요!
어느 날, 캐나다 빅토리아에서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우연히 두바이에 노회가 있어 방문 예정인데 시간이 맞겠느냐는 것이었다. 두바이에서 손님맞이를 해본 적이 가족 말고 없던 나는 그런 목사님의 방문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목사님과 마주 앉아 나는 괜스레 마음을 놓고 그동안 있었던 일, 어쩌다 두바이까지 오게 됐는지 등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빅토리아에서 1년여의 시간, 두바이에서 지내던 때. 나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밖으로 돌게 되었고, 처음 빅토리아에서 지낼 때만 해도 타지 생활이 체질인 줄 알았는데 아예 터를 잡고 나와 있으면서 겪는 심적 변화가 이따금 무겁게 다가온다는 것도 말이다. 무엇보다 나는 가족, 주변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는데, 목사님 역시도 오랫동안 해외에서 목회 활동을 해오신 분이라 그런 내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듯했다.
타지에 나와 살면 사실 다 죄인이 된다
밖에 나와 있다 보면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챙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물론 승무원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타지 생활을 하시는 분들에 비해 자주, 쉽게 집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일 때도 있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소중한 순간을 다 놓치고 함께해야 할 그림에 내가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게 다가왔다. 게다가 이후 미국으로 떠나 자리 잡을 계획을 갖고 있던 때라 과연 잘 하는 결정인가 하는 죄책감 비슷한 것이 있던 참이었다. 그런 내게 목사님은 자신도 마찬가지라며 사실 타지에 나와 살면 나도 모르게 죄인이 된다고 하셨다. 본인도 아주 오래전부터 집을 떠나, 이 나라, 저 나라, 이 도시, 저 도시를 옮겨 다니며 가장 죄송한 것이 부모님이라고 하셨다. 그곳에서 보아온 이민 가정의 삶을 봐도 다들 그저 한편에 품을 수밖에 없는 아린 구석처럼 보였다. 임종조차 지켜드리지 못하고, 살아생전에 효도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가슴 아픈 사연들이 한 둘일까. 당장 사소하게는 부모님께서 보고 싶어 하실 때도, 혹은 내가 즉시 필요한 자리에도 바로 갈 수 없는 처지이다 보니.
아픈 엄마를 뒤로한 채
엄마는 몇 년 전, 뇌종양으로 수술을 하셨다. 불행하게도 수술 후 부작용으로 한쪽 얼굴의 신경이 거의 마비되다시피 하셨다. 한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으셨고 꽤 오랜 시간 동안 혀의 놀림도 자유롭지 못해 말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셨었다.
늘 건강하기만 했던 엄마가 10시간도 넘는 수술 끝에 나온 모습을 보고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게다가 뇌 척수가 흐르는 증상으로 꼼짝없이 병상에서 한 달간, 하늘을 본 자세 그대로 누워만 있으셔야 했었다. 대소변을 받아내며, 어쩐지 복잡한 심경이 되었지만 아마 아직 이럴 나이가 아닌데 이러고 있는 자신의 비참함이 더 컸을 엄마를 위해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불편한 상태로 퇴원한 엄마는 그럼에도 곧장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우리는 애써 평소의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하려는 엄마를 바라보며, 점점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도 잊어갔던 것 같다.
한 번은 엄마와 함께 동생을 데리고 입시설명회에 간 적이 있었다. 학교 강당에 자리를 대충 잡으며 밖에 준비된 간식을 좀 챙겨 오려고 돌아섰다. 분명히 '잠깐만 있어봐'라고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듣지 못했고 우리를 놓친 줄 알고 온 강당 안을 돌며 애타게 찾으신 모양이었다. 막 도로 강당에 들어서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엄마를 마주했다. 엄마를 부르자마자 그 얼굴에 안도감이 퍼졌는데 곧장 원망하듯 얼굴이 일그러지셨다.
"아니,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 엄마, 잘 안 보이잖아.."
아, 맞다. 엄마가 잘 못 보시지. 그때의 감정을 충격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것보단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이랄까.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 앞에서는 퉁명스럽게 대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실은 엄마 몰래 눈물을 훔쳤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픈 뒤 엄마는 차츰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가시 돋히고 온통 처지 비관인 엄마에게 점점 지쳐가기도 했다. 세상이 무너지는듯 했을 엄마에게, 나름 위로의 말로 엄마가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니라며 긍정적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엄마는 그게 오히려 상처로 남았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운신의 폭이 줄어드는 그 감옥 같은 답답함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언젠가 평소 허리디스크를 앓던 내가 두바이에서 허리가 갑자기 아파 거동도 못한 채 거의 열흘을 침대에 누워있었던 적이 있었다. 갑작스런 통증으로 몸조차 일으키지 못하게 된 며칠간의 절망이란. 세상과 단절된 것만 같은 그 한없는 지루함과 무력감. 걱정하실까봐 말도 못하다가, 호전되어 다시 비행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일이 있었노라고. 나는 고작 며칠에 무너질듯 했는데 몇 년을 그리 보낸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었냐고.
긴 세월 바느질을 하며 수선집을 운영해오셨던 엄마는 자신의 능력도 더이상 펼치지 못하는 상황에 아무 준비도 없이 맞닿뜨렸다. 그러다 용돈벌이라도 해보겠다며 교복집에 아르바이트를 갔었단다. 종일 업무이니 점심도 드셔야 할거라 해서 도시락까지 싸갔는데, 엄마는 한쪽 눈이 거의 안 보이시니 마음처럼 손놀림이 자유롭지 못해 당황하셨고, 업장에서는 죄송하다며 돌아가 달라고 했단다. 버스비도 아까워 걸어서 집에 오는 길에 마주친 공원에서 아침에 싼 도시락을 까먹으며 회한에 잠기셨다는 말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몇 해에 걸쳐, 차츰 육신도 정신도 많이 회복하신 엄마. 이제는 심지어 못 다한 학업의 뜻을 펼치시며 열정을 불태우시는 자랑스러운 나의 엄마.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그 과정은 감히 몇 글자로 적어 내릴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런 엄마를 두고 계속해서 밖으로 도는 결정을 해온 나이다. 아무래도 형제자매가 있어 안심이 되는 부분도 있고, 지금은 씩씩하게 다시 공부까지 하고 있는 엄마의 밝아진 모습을 위안 삼는 것도 있다. 그래도 나는 가족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 많은 엄마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얼마 전 전화통화에서, 엄마는 어려서부터 가족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너네들 다 키운 뒤에도 다들 북적북적 모여 지냈으면 했는데 그게 마음 같지 않으시다며, 그동안 본인이 타인에게서 행복을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원치도 않는 배려를 해놓고 보상을 바랐던 것 같다는 말을 하시는데 왠지 마음이 무거웠다.
미국으로 오기 전, 한 달 동안 집에서 쉼을 가졌다. 그동안의 긴장이 풀렸는지 2주 동안 병치레를 했다. 엄마는 나의 한 달을 아주 정성스럽게도 보살펴 주셨다. 본인이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뒤치다꺼리는 다 해주는데 왜 자꾸 멀리 떠나 지내려고 하느냐며 농담하듯 말씀하셨다. 그게 비단 농담이 아님을 안다. 처음에는 신나서 돌아다니는 삶을 택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 마음이 무겁다. 나라고 왜 부모님 곁에 있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일
미국에 온 지도 벌써 6개월을 채워간다. 지금은 언제 집에 갈 수 있을지, 앞으로 얼마나 자주 집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른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경조사를 놓치게 될 지도, 앞으로 얼마나 많은 가족사진에 내가 없을지도, 앞으로 얼마나 많은 지인들의 모임에 빠져야 할 지도. 그래도 우리 가족은 말한다. 그곳에서 행복하고 건강한 것, 그렇게 잘 지내는 모습 보여주면 그걸로 된다고.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도 갖지 않아도 된다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열심히 해내련다.
그리고 어버이날인 오늘,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야지. 그 어느 때보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