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빗속에서도 춤추는 법을 배울 시간

인생은 해뜨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도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

by 글쓰는 김민정

왜 우리는 유독 ‘서른’이라는 담론 앞에 주저하는 걸까?

딱히 이룬 것 없이 나이를 먹어서? 청춘도 아니고 중년도 아닌, 시기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애매하기 이를 데 없어서?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괜찮아서일지도 모른다. 나이 먹을 만큼 먹었고, 애매하기 짝이 없건만 문제는 이 모든 게 희한하게 견딜 만해서 이렇게도 살아지겠다 싶은 망연함.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을 절대 문장처럼 삼아 왔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삶에 젖어들고 있더라는 실망감. 자칫하면 쭉 이대로 이렇게 살 것 같은 두려움. 받아들일 수도, 쳐 낼 수도 없는 그런 서툰 감정들에 휩싸여 우리는 그냥 ‘서른’이 반갑지 않다.

혹시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갑자기 비가 쏟아지던 날, 거리에서 급히 마련한 싸구려 우산 아래 아슬아슬 은신해 있다가 냅다 빗속으로 뛰어들어본 적이 있는가? 옷이 젖을까 봐, 엄마한테 괜한 잔소리 들을까 봐, 행여 감기라도 들까 봐, 조금 전까지 내리 누르던 근심이 사라지고 웅크렸던 온몸의 근육이 확장됐다. 맥이 풀리면서 웬일인지 해방감까지 느꼈더랬다. ‘서른’을 지나면서 그 기억이 마치 삶에 대한 은유처럼 다가왔다. 스물아홉과 서른 사이에 찾아오는 갖가지 상념은 결국 빗속에 뛰어들기 전의 갈등과 같다. 혹시 내가 숨어들려고 안간힘으로 부여잡고 있는 게 곧 찢어질지 모를 싸구려 우산은 아니었는지. 결국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사는 게 최선일지니.

서른은 어른의 삶을 고민하기 시작하는 나이다. 여물기 전 ‘서’투른 어‘른’. 그래서 서른일지도 모른다. 젊음을 담보로 물불 가리지 않고 세상에 맞설 수 있는 이십 대도 아니고 삶의 범위가 일정 수준 보장된 사십 대도 아닌, 그러나 가슴속에는 이루지 못한 꿈이 펄떡대고 보장된 것이라고는 내일이 있다는 사실밖에 없는, 기막히게 애매한 어른의 시간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래서 서른에 들어선다는 건 자의든 타의든 많은 선택 앞에 놓이게 된다는 뜻이다. 특히 서른은 선택의 시행착오를 겪고도 인생을 뒤집을 수 있는 어쩌면 생의 마지막 타이밍이기에 대부분 사람들이 ‘서른 병’을 겪는다. 선택에 정답이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우리는 선택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으므로 서른의 사춘기는 청소년의 그것보다 어렵다.

애초 이 글모음집은 ‘어른도 아이도 아닌 서른’이란 제목으로 시작되었다. 반년 가까이 쓴 글은 내 안에 갇혀 쓴 습작에 지나지 않았다. 신기한 건 그게 습작일지라도, 실체 없는 푸념일지라도, 온갖 것을 꺼내놓고서야 비로소 ‘서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비워야 채우고, 허기져야 고픈 법이 고스란히 통했다. 우리는 대개 버리기보다 가지는 데 익숙하다. 대학에 입학하려면 수학능력을 갖춰야 하고, 직장에 들어가려면 스펙을 채워야 하듯, 서른 앞에서도 남들처럼 혹은 남들보다 가지지 못한 게 못내 우울하다.

‘인생은 해가 뜨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도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작가 미상’이란 문장을 헤아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서른은 빗속에서도 춤추는 법을 배워야 할 시간이라고.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