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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김민정 Jun 19. 2019

오래될수록 아름다운 것들

김민정의 제주산책 walk&talk ⑥ 

친정집 안방에는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다. 20여 년 전 다섯 식구가 사진관에 가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열두 살의 나는 세라복을 입은 채 새침하게 앉아 있고, 서른여덟의 엄마는 정장 차림새에 위풍당당이 흐른다. 커리어우먼이었던 엄마는 어린 내 눈에 세상에서 제일 멋졌다. 아주 큰 세상이었다. 어느새 내가 딱 그때 엄마 나이가 되어간다.     


엄마가 제주에 오는 날, 일찌감치 공항에 나가 목을 빼고 기다렸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엄마 손엔 주렁주렁 짐이 달려 있었다. 딸네 집에 온다고 무얼 바리바리 싸 왔다. 예전의 엄마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 10년 전 퇴직한 엄마는 귀촌해 과거와 전혀 다른 일상을 살고 있다. 이제는 내가, 여동생과 남동생이, 엄마의 커다란 세상이다.     


둘만의 여행은 오랜만이었다. 이번엔 아예 성산에서 하루 외박하기로 했다. 차를 몰아 향한 곳은 오조포구. 물이 졸졸 흐르고 성산일출봉이 아스라이 보이는 아담한 포구는 내가 제주에서 가장 애정하는 곳이다. 오조리는 외할머니의 고향이기도 한데 어째선지 엄마랑은 가본 일이 없었다. 마침 유채꽃도 예쁠 무렵이니 인근을 돌아보면 좋겠다 싶었다.      


근처에 다다르자 방역초소에 근무하던 한 할아버지가 차를 멈춰 세웠다. 어딜 가냐 묻더니 방향을 일러주고는 손을 흔들었다. 문득 어른들이 계신다는 사실이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느닷없이 어른들의 존재가 퍽 감사해졌다. 그렇게 길을 알려주고 손을 흔들어주는 어른들이 있는 지금이, 조수석에 엄마가 타고 있는 이 시간이 새삼 행복한 일임을 알아차렸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엄마는 과거를 되짚는 모양이었다. 외할머니는 고성리에 살던 외할아버지를 만나 제주 성안에서 4남 3녀를 낳아 기르다 막내딸인 엄마가 어릴 적에 부산으로 터를 옮겼다. 그러니 엄마에게 오조리는 대여섯 살 유년시절의 기억에 멈춰 있을 것이었다. 아무래도 퍼즐이 맞춰지지 않는지 다음에는 외삼촌에게 물어오마, 했다.     


포구에는 이미 여행객 한 무리가 도착해 드라마 <공항 가는 길>의 촬영지로 쓰인 작은 집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네모난 창 안에 성산일출봉이 오롯이 담기는 돌집. 오랜 시간 선구 보관 창고였던 곳을 고쳐서 촬영장으로 썼고, 이듬해 마을 고유의 이야기를 담은 무인 전시 공간 ‘오조리 감상소’로 탈바꿈했더랬다.     


하지만 열 달 만에 다시 찾은 그곳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지난여름, 솔릭의 직격타를 맞았다더니 태풍이 할퀴고 간 흔적이 선연했다. 지붕은 일부를 잃었고 전시물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거나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며 그나마 남은 전시물들을 찬찬히 읽어 갔다. 한쪽 벽 귀퉁이에 쓰인 글귀가 시선을 붙들었다.     

너무 오래되어서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들,

우리는 그것을 집, 엄마, 추억이라 말한다. 

(중략) 

마치 집에 온 것만 같이 마음이 놓이고, 

엄마같이 따듯한 모두의 추억 속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 여기 오조리, 오조리 감상소.     


나는 한때 ‘오조’라는 이름이 하도 예뻐, 이다음에 아가가 태어나면 ‘오조’란 이름을 붙여줄 거라 말하고 다녔다. 남편이 ‘조 씨’이니 ‘앞으로 해도 조오조, 거꾸로 해도 조오조’ 운율도 괜찮고, 무엇보다 내 이름이 워낙 흔한 이름이라 아이에겐 훗날 자신의 브랜드로 해도 될 만한 독창적인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물론, 출산 계획 후의 일이겠다만.     


오조리는 나 오(吾), 비칠 조(照)를 써 ‘나를 비추는 마을’이라 한다. 엄마와 함께 한 오조리 여행은 나의 뿌리, 엄마의 뿌리를 더듬더듬 짚어 가며 궁극에는 스스로를 비춰보는 시간이었음이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 검색창에 ‘오조리 감상소’를 검색해 보니 이곳에 난 상처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 회복되길 원하는 목소리가 적잖이 들렸다. 나 역시, 오랜 시간 포구를 지키면서, 거쳐 간 사람들의 기억을 비춰내는 그 장소가 오래도록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득한 세월이 흘러 ‘오조’도 이곳에서 자신을 가만히 비출 수 있길 바란다면 너무 큰 욕심이려나.     


[김민정의 제주산책 walk&talk]는 동명의 제목으로 제주도의회에 연재 중인 칼럼을 묶은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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