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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Apr 11. 2021

은아. 나는 요즘 글쓰는 게두렵다.

이삿짐을 정리하며 발견한 과거 글 모음집



그동안 스스로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글쓰기가 두렵거나 무섭지 않았는데. 요즘은 글을 쓴다 생각하면 덜컥 겁부터 나. 일상생활 속에서 내가 횡설수설하고 있음을 느낄 때, 그 멍청함이 얼마나... 얼마나 비참한지. 이미 뱉은 말을 혹은 이미 읽힌 글을 지워버리고 싶을 때가 얼마나 잦은지 너는 모른다.


우울이 나를 뒤흔들고 지나간 뒤로 나는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아. 사람들과 어색하지 않게 대화하는 법이나 내 의사를 표현하는 법 같은 것들. 나는 이제 아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는 찰나의 순간에도 상대방의 눈치를 본다. 무의식적인 찰나가 지나가고 나면 항상 당당하지 못한 자신을 미워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은아. 나는 이대로 어른이 되어가는 내가 무섭다. 글쓰기를 멀리하는 내가 두려워. 그래서 더 돌이킬 수 없어지기 전에 조금씩 천천히 글을 다시 써보기로 했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다시 시작할 거야. 거기서부터 사람을 대하는 법도, 인생을 살아가는 법도 조금씩 다시 이해하게 되겠지. 너만은 나를 이해해주리라 믿어. 사랑하는 내 이상.


- 2019. 8. 4.




소갈비찜에 넣을 당근을 둥글게 손질하며, 모나지 않게 살기 위해 스스로를 깎아온 지난날을 생각한다. 어차피 뒤섞이면 저절로 깎일 부분인데. 남에게 작은 부스러기 남기지 않기 위해 제 살 도려내는 일은 얼마나 참담한가.


부엌 한 켠에 뭉근한 국물이 끓는 저녁. 내게서 떨어져 나간 나의 부분들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생각하며, 삶의 한 귀퉁이에 남겨진 씁쓸함을 곱씹어 본다.




참고문헌 제목에 기울임 태그를 적용하다 문득,

여긴 조금 기울어져야 주목받는 세상이구나하는 생각이.




비 오는 날은 자연스레 발밑을 보며 걷게 된다. 혹시 웅덩이를 밟지는 않을지, 진흙 위를 디뎌 신발을 더럽히지 않을지 걱정되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을 걷고 또 걷다 보면, 자꾸만 비는 내리고, 나는 계속 내 발 밑의 문제에만 매달린다. 바로 이게 문제가 된다.


햇빛이 맑은 날엔 어디를 보고 걸어도 좋다. 고개를 들고 흘러가는 구름을 보아도 좋고, 조금 시선을 내려 살랑이는 나뭇잎을 보아도 좋다. 고개를 숙이고 걷더라도 걸어가는 발걸음 아래로 그늘 사이 빛이 비치는 풍경, 싹트는 생명, 그 모든 것들이 나와 함께 숨 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유 없이 설레고 힘찬 시간. 흐린 날도, 바람 부는 날도 각자 나름대로의 운치와 사색이 있다. 어디를 보고 걷던지 간에.


그러나 비 오는 날 만은.

비가 오는 날에는 앞을 보고 걸어야 한다.

내게 주어진 작은 우산 속의 공간에서 고개를 숙이고 걷다 보면, 내 인생에 비 오는 날이 있다는 것이 슬퍼진다.


- 2020. 7. 12.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니 나는 이미 우주의 먼지였다.




우리는 수만 년 전에 별이 남긴 빛의 흔적을 보며, '별이 떴다'고 부른다.

수백 년 전 가난함과 배고픔에 지쳐 쓰러진 어느 예술가의 그림을 가리켜 '명화'라고 부르는 것처럼.




때론 삶의 모든 일이 그렇다. 너무 오래, 너무 깊게 고민한 선택은 쉬이 사람을 실망시킨다.

너무 많이 기대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듣지 않는데 끊임없이 말을 하는 목소리가 있다.


문득 귀를 기울이면 엄마- 하고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 강아지 짖는 소리. 저녁 밤을 밝히는 떠들썩한 웃음소리. 목소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내지만 정작 누구에게도 가 닿지 않는다.


목소리는 공간의 적막을 깨어낼 뿐. 잔잔한 호수 위를 날아가는 물수제비처럼, 한 지점에서 뱉어낸 소리는 멀리 퍼져나가며 고요를 뿌리치고 바지런을 떤다.


누군가에게 시간을 쓰는 게 애정이라면, 그 목소리가 내게 말을 하는 시간도 애정일까?

쉬이 잠들 수 없는 밤에, 가만히 누워 36인치의 심연을 본다. 그 너머의 목소리를 생각한다.

우리 삶에 얽힌 것들을 헤아린다.


- TV를 보다가




슬픔이 티슈처럼 가볍게 뽑을 수 있는 거라면 좋을 텐데.




한 인간의 삶의 과정은 예술적이다.


젊은 날을 유화로 살다 담채화로 죽는 사람, 조각으로 살다 끝내 판화가 되는 사람, 누가 뭐래도 설치미술의 길을 가는 사람.


삶에 주어지는 색채와 재료는 다채롭고

우리 모두의 삶은 작품이 된다.




"주승아. 잔디도 꽃이 필까? 잔디도 번식을 할 테니 꽃이 피겠지? 나는 꽃이 피지 않는 식물이 좋은데."


"찾아볼까?"


"응."


"고사리나 이끼는 꽃이 안 핀대."


"그럼 난 이끼처럼 살래. 사람의 인생이 꽃이라면, 평생 꽃 하나 피우기 위해 살고, 꽃 피우고 나면 지기만을 기다리다가 죽는 거잖아. 난 그런 삶은 싫어. 늘 한결 같이 살다 그 모습대로 갈래."




가끔은 언어가 삶을 침범한다. 아무 의도도 없는 척 삶을 파고 들어와 한 세계를 흔들어 놓는다.


'감정 쓰레기통'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이후로 내 일상의 어두운 부분은 남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 달의 뒷면이 되었다. '오글거린다'라는 단어가 유행한 이후 종종 마음을 담아 보내던 편지쓰기를 그만두었다. 매번 즐겁게 이야기하고 뒤돌아서는 길에 내가 했던 이야기들이 'TMI'는 아니었을까 고민한다.


가장 무서운 점은, 그것이 다만 언어에서 비롯된 불안임을 알면서도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이제는 이 불안한 단어들을 알기 전으로는 도무지 돌아갈 수가 없다.





이삿짐을 정리하며 버릴 노트들을 뒤적이다

옛적에 써놓은 문장들을 찾아 브런치에 기록해둡니다:)


언젠가 이 글들을 이어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때의 감정처럼 글을 쓸 수는 없어,

아쉽지만 문장으로만 남겨두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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